송구영신 유감(有感)
송구영신 유감(有感)
  • 전주일보
  • 승인 2019.12.1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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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 /논설위원
이 현 재 /논설위원

세상사야 어찌 돌아가건 천지운행은 만고의 법도를 어기는 일이 없어 지구가 태양을 또 한 바퀴 도니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감회는 언제나 새롭다. 속절없이 지나버린 세월에 대한 공허함과 새해의 기약 없는 희망이 교차하니 송구영신(送舊迎新)’이다.

하지만 무엇이 낡은 것이며, 또 그 무엇이 새로운 것이란 말인가? 한 때는 새로웠던 것도 시간과 함께 낡아버리니 인간사엔 새로운 것은 사라지고 종국엔 낡은 것만 남는다.

 

권력과 함께 한 역법의 변천사

 

기해(己亥)년 올 한해도 마찬가지였다. 60년만의 황금돼지띠, 어쩌니 하면서 부질없는 희망을 잔뜩 안고 출발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되는 일 없이 벌써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다시 흰쥐띠운운하며 경자년(庚子年)’ 2020년을 기약한다.

하기야 시작도, 끝도 없는 영겁의 시간에 금을 긋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을 1년이라고 한다지만 누구라서 그 첫날을 알겠는가.

세수(歲首)로 삼는 원단(元旦) 자체가 고대 중국에서 왕조가 바뀌면서 수시로 변했으니 월력(月曆)은 무상한 권력의 변천사였을 뿐이다.

고대 중국에서 하() 나라는 인월(寅月)1년의 첫 달로 삼았다. 지금의 음력 정월이다. 그러나 하 왕조를 이은 은()나라는 오늘날 섣달인 축월(丑月)을 세수로 삼았다. 그러다 은을 잇는 주() 왕조가 나와 동짓달인 자월(子月)을 세초로 삼았다. 왕조가 새로 들어서면 정월의 첫날인 설을 바꿔 전 왕조의 흔적을 지운 것이다.

왕조가 바뀌고 새로운 역()을 반포하면 그 왕조의 영향권에 속한 곳은 그것을 받아 시행했다. 이것이 소위 그 왕조의 월력에 든다, 정삭(正朔)을 받든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설은 섣달의 음전(音轉)이니 은의 역법이다.

서양 또한 다르지 않다. 로마시대에는 3월인 마치(March)가 정월인 1월이었고, 이로부터 다섯째 달을 줄리어스 시저가 태어난 달이라 해서 줄라이(July), 여섯째 달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오거스트(August)라 했다. 셉템버(September)와 디셈버(December)는 그때 역법으로는 7월과 10월이었다. 이후 제뉴어리(January)1월로 삼고 페브루어리(February)를 그 뒤에 두어 March3, July7, September9, December12월이 됐다.

음력과 양력의 관계에도 정치적 역학이 작용했음은 마찬가지다. 동양이 고유의 역법을 폐기하고 서양의 역법을 사용한 것은 근대사가 서양으로 기울었던 세계정세를 웅변한다.

 

‘3%의 진실로 전락한 선거법 개정

 

월력의 역사와 속성이 그래서일까. 타임스케줄로 돌아가는 그 시간표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 인간도 힘과 권세를 좇는다. 언제나 연말이면 다사다난으로 수렴되는 한해의 기록들이 이를 웅변한다.

독일의 18세기 물리학자이 리히텐베르크(1742~1799)는 풍자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독설가로도 유명하다. 그가 언젠가 한 해의 신문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읽어봤다. 지나간 1년의 역사를 나름대로 간추려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남는 것은 허망뿐이었다. 거기엔 50%의 그릇된 희망과 47%의 거짓된 예측만이 무성하게 얼룩져 있었다. 진실이라곤 3%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부터 신문은 ‘3%의 진실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어디 언론뿐이던가. 올해도 우리사회 이곳저곳에서 정의가 불의로 변질된 모습들이 확인됐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권력층 인사들이 속속 위선의 가면 속 민낯을 드러내고, 국민들은 진영으로 나뉘어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었다.

세상사가 그런 것 아니냐고 짐짓 고개를 돌려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선거법 개정 파행만큼은 외면할 수 없다. 도대체 선거법이 무엇이던가? 권력 중에서도 최상위 권력을 선발해 대의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원칙이다. 그 법으로 선출된 대표들이 최대다수 최대행복을 위한 정의(正義)의 최대공약수를 도출해 민주(民主)의 토대를 쌓는 예술을 수행한다.

문제는 사람 중심의 인치(人治)가 그 소임을 항상성으로 보장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경험상 그것은 연목구어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역사는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법과 제도에 바탕 하는 법치(法治)를 세워 앞을 향해 나아갔다. 선거법은 정치가 구현해야 할 정의를 담아내는 에 다름 아닌 셈이다.

 

소외층 이익 극대화가 정의

 

그렇건만 선거법 개정 방향을 두고 각 정당들은 중구난방이다. 말이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속셈을 모르는 국민들은 없다. 그러니 교묘한 말과 복잡한 내용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최대한 가려야 한다. 비례대표 의석이 당초 합의보다 크게 축소된 가운데 병립형 연동제, 석패율, 연동제 씌우기 등 하루가 다르게 합의가 폐기되고 알 수 없는 용어가 난무한다. 그러다보니 흡사 개혁이 아니라 개악을 낳는 꼴이 돼버린 지 오래다.

나름대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족스런 수준은 아니지만 거대 양당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현행 선거법의 독소조항을 거둬내는 작업의 출발에 해당한다. 그러니 정치의 본질인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 합의를 도출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정의에 대한 인식은 고래 그리스 이래 2500년의 여정 끝에 현대 들어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 확산돼 있다. 그 핵심이 권리의 극대화. 또 그 골자는 사회적 최소 수혜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의 2차 분배다. 선거법도 다를 바 없다. 표의 산술적 등가성 확보를 기본으로 하지만 더 나아가 농어촌과 낙후지역 등 열악한 계층과 지역을 배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거대 양당은 명백한 원칙을 외면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결말도 회의적이다.

하기야 정의도 권력과 결탁하면 불의로 낡아간다. 올해도 그랬으니 내년도 그럴 것이다. 기해년을 보내고 경자년을 맞는 송구영신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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