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다리
내 안의 다리
  • 김규원
  • 승인 2019.12.1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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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백 금 종/수필가
백 금 종/수필가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가을 어느 날, 문학기행에 나섰다. 버스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나 갯내음 물씬 풍기는 바닷가에 닿았다. 멀리서 보아도 허공에 높이 솟은 교각이 눈앞에 펼쳐있다. 압해도와 암태도의 머리를 딛고 웅장하게 놓여 있는 천사 대교다. 최근에 준공된 이 다리는 그 길이가 7.2km이고 1공구는 사장교, 2공구는 현수교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물게 초현대식 공법으로 건설된 아름다운 다리이다. 토목기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다리가 이곳이라니 기대가 넘친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자동차도 가다, 서다. 를 반복할 정도로 혼잡하다. 마치 명절날 고향 찾는 차량처럼 붐빈다. 그러나 누구 하나 탓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왜 다리로 모여들까? 그것은 우리 문인들과 같이 다리에 대한 멋진 소재를 찾기 위해서 온 이들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리의 기능인 소통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일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사람, 이웃 간에 불화가 있는 사람, 말을 안 듣는 자식 때문에 애간장을 녹이는 사람, 사사건건 반대만 하여 성격이 안 맞는다며 불만이 많은 부부가 찾아오는 곳이 다리이리라. 다리 위를 천천히 걸으면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답답한 마음을 말끔히 씻어내고, 다리 너머 펼쳐진 서해로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결을 보며 세상살이도 저 소용돌이치는 파도와 같은 것임을 배우기 위함도 있으리라.

다리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요 새로운 세계로 뻗어 나가고자 하는 욕망의 간이역이다. 그리고 경관의 아름다움에 도취케 하는 탄성의 감탄부호이다. 그러하기에 다리 위에는 많은 삶의 애환이 서리어 있는 곳이다. 만나는 이들의 감미로운 포옹이 있고 이별하는 이들의 뜨거운 눈물도 있다.

내 삶의 여정에도 엽서처럼 등장하는 곳이 다리이다. 아름다운 고향 다리가 가끔 나를 그곳으로 이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쯤, 어머니는 채소를 머리에 이고 그 다리를 건너서 장터에 가곤 했다. 고개가 부러질 듯 머리에 이고 간 그 농산물을 판 뒤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탕이나 과자를 사 오곤 했다. 명절 때면 옷이나 신발도 사 오곤 했다. 어머니가 장터에 간 날은 나는 고개를 그 다리 쪽으로 내밀고 해질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먼발치에서 어머니가 나타나면 어미 찾아 나선 송아지처럼 그 다리를 달음박질해 가곤 했다.

그런가 하면 나의 뇌리에 죽음이라는 낱말을 새기게 했던 곳도 그 다리였다. 6.25 전쟁 때 우리 마을의 다리에서는 아군과 적군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가면 총 맞은 시체가 즐비하고 여기저기에는 핏자국이 선연했다. 시체를 가득 실은 화물차가 그 다리를 넘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몸서리쳐지는 그 장면은 지금도 석화처럼 남아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다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모두 떨치고 오늘은 천사 대교의 난간에 서 있다. 넓은 바다 위에 육중하게 걸쳐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아니 섬과 섬을 한 몸처럼 이어준 점이 고마운 존재이다. 이곳 사람들의 소통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다리 위를 스쳐 가는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곳까지 찾은 수고에 보답이라도 하듯 청량감까지 안겨준다. 더군다나 최신 공법이 도입된 다리가 아니던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이유도 이런대서 연유한 듯싶다. 옷이나 자동차도 최신 제품에 집착하듯 다리도 산뜻한 모습으로 태어날 때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찾는듯하다.

다리의 고향은 물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어느 곳이나 물이 있기 마련이다. 물에서 태어나 물에서만 살던 다리가 산업이 발전하고 생활환경이 나아지자 타향까지 출타했다. 그래서 계곡에도 구름다리나 출렁다리가 등장했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 타지에서 터전을 잡듯 다리도 그렇게 고향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가 고향을 그리워하듯 다리도 본래의 고향인 물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섬과 섬이나 섬과 육지 사이에는 마치 과거에 등과 한 후 금의환향하는 선비같이 장엄한 다리가 등장한다. 그 다리들이 관광지로 소문나 타향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도 있지만 본래 그의 바람은 고향 사람을 위한 다리로 살아가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다리를 건너면서

이렇게 편한 것을라고 읊조리는 주민들의 탄성에 보람을 느끼고, 겨우 달구지나 끌고 건너던 농부가 경운기나 트랙터 등 농기구로 달리며

이렇게 편리한데 왜 이제야 놓았지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하루의 피로를 강바람에 날려 보낼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자동차들이 거침없이 달리고 구름처럼 밀려오는 관광객이나 아베크족을 보면서 자기의 위용이 이런 줄 몰랐다고 은근 슬쩍 뽐낼 것이 아닌가? 다리는 바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함을 보람으로 알고 존재하는 것이려니 싶다.

그러나 진정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다리는, 개울 사이의 섶다리나 섬과 섬 사이를 이어주는 거대 교량이 아니고 내면에 품고 있는 마음의 다리가 아닌가 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부모의 다리, ‘참된 인간이 되라.’ 며 자신을 밟고 건너라는 스승의 다리,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봉사의 다리가 그것이다.

나도 이제 노령에 이르렀다. 마음속에 작은 다리라도 놓을 일이다. 이웃들이 내게 스스럼없이 건너오고 나 또한 이웃을 향해서 마음을 열 수 있는 다리. 그래서 소통하고 이해하며 더불어 살 일이다. 천사 대교 같은 큰 다리는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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