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
빈손
  • 전주일보
  • 승인 2019.12.0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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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짠돌이라고 왕소금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들을 가르쳐야 하고
집을 장만해야 하고
할 일은 많고 쥔 것은 없었다

나는 달렸다 맨 주먹을 불끈 쥐고 바람 속을
짐승처럼 달렸다
앞만 봐야한다고 생각하면서
곁눈질이나 뒤를 돌아보는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동안 발바닥에 불이 나고
손바닥에 옹이가 박혀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주위를 돌아보았다
애들은 저희 길을 따라 가버린 한 참 후였고
집은 텅빈 껍데기만
댕그라니 남아 있었다
세상에 혼자 버려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여전히 빈손이었고
두 팔은 허공을 젓고 있었다

 
껍데기라는 말에는 알맹이가 있다는 것이다. 껍데기 안에 튼실한 알맹이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계속 껍데기 안에 머물러 있다면 결코 빛을 볼 수 없다. 모든 생명은 껍데기를 벗고 나온다. 안전한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세상을 향해 얼굴을 내민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험이 될 수도 있다. 바람을 타고 멀리 가는 씨앗들도 있다. 새나 짐승들의 밥이 될지 모른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 여행이지만 그런 여행이 없이는 결코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없다. 껍데기도 할 말은 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뱀이나 악어 껍데기는 지갑이나 가방이 되고, 양 가죽은 점퍼가 되고, 소가죽 말가죽은 신발이 된다. 도처에 껍데기들이 넘쳐난다. 젊음이 가버린 늙은이, 밑천을 날린 장사꾼, 엔진을 들어낸 자동차 등 껍데기들이 널려 있다. 껍데기만 남은 것들을 어루만지고 나니 허공뿐이다. 그러나 껍데기가 없으면 내실內實도 없다. 설령 육신은 껍데기로 남아도 마음만이라도 따스한 온기가 온 몸을 타고 퍼져 나간다면 아직도 살아있다는 증거다. 살아있는 자가 복 받은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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