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만나고 싶은 사람들
꼭 만나고 싶은 사람들
  • 전주일보
  • 승인 2019.11.21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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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이 용 만 /수필가
이 용 만 /수필가

전주 시가지 동편 끝.

기린봉 산줄기와 승암산, 그리고 이목대 사이에 낙수정이라는 곳이 있다.

이름 그대로 아주 조용한 곳이다. 내로라는 지관이 자리를 잡았음직한 군경 묘지가 이곳에 있으니 그만하면 터도 명당인 셈이다.

그런데 이곳에 잘 사는 사람은 없으니 옛 사람들이 명당을 통하여 후손들에게 내리고자 했던 복이, 돈을 많이 벌어 부자로 살라는 것은 아니었던가 보다.

그러나 인심은 후해서 시골 냄새, 고향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고향을 떠나 도회지에 와서 자리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 떠난 설움을 이 곳에서나마 서로 달래 주며 위로 받게 했으니 옛 사람들의 뜻이 여기에 있었던가 보다.

이곳은 대부분의 집들이 산중턱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다. 이곳에서 살다가 돈이 좀 모아지면 이곳을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엔 또다시 시골에서 갓 올라온 사람들이 자리를 메운다. 그래서 언제나 이곳은 시골 사람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나는 고교 시절 3년을 꼬박 이곳에서 보냈다. 시골에서 나서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이곳 풍경이나 사람들이 내 생리에 맞는 곳이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겨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뒤안으로 난 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작은 산의 봉우리였고 거기에서 곧장 올라가면 기린봉까지 오를 수 있었다. 거기에서 바라보면 멀리 팔복동 공업단지에서 하얀 연기들이 푹푹 나는 광경이 사람 사는 맛을 나게 하였다. 그래도 기운이 남으면 칼바위라고도 부르고 중바위라고도 불렀던 승암산까지 갔다가 내려오기도 하였다. 승암산에서 바라본 시가지는 또 다른 맛을 보여주었다. 산에 오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는 집이어서 더 호감이 가고 정이 가는 곳이 내가 살던 낙수정 달동네였다.

이곳에는 울타리들이 거의 없었다. 물론 도둑도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3년 동안 한 번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 본 적이 없다.

 

학생은 공부 잘해서 장차는 이런 곳에서 살지 마.”

큰방 아저씨가 누누이 부탁하던 말이었는데 지금 다시 그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어짐은 무슨 까닭일까.

얼마 전 옛 생각이 나서 그 곳엘 찾아갔다가 하나같이 시멘트 담들이 둘러 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실망을 했다. 내가 살았던 집도 시멘트블록으로 지은 양옥집이 되어있는걸 보고 한숨만 쉬다 돌아왔다.

문만 열고 나오면 한 자리에서 몇 집씩 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그 때의 모습을 생각했던 나에겐 소중한 것을 놓쳐버린 듯 허전하기만 했다. 몇 집을 기웃거려 봐도 아는 얼굴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

하기야 벌써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가. 그때 그 사람들이 지금도 그곳에서 그 모습 그대로 살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들의 소망대로 돈을 벌어 시내 한 가운데로 들어갔어야지…….

승암사에서 새벽마다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은은했던 그곳은 게으른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시계가 귀하던 시대여서 먼동이 트기가 무섭게 서둘러 일터로 나갔기 때문에 해만 뜨면 동네가 조용했다가 해가 지고 일터로 나갔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들어오면서부터 다시 또 요란해지는 것이었다.

어이 동생!”

예 형님!”

여기저기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허허 웃으며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다.

바로 옆집에서 2년을 같이 살았으면서도 어느 모임에 가서야 이웃에 살고 있었음을 알았다던 요즘사람들. 걸핏하면 층간 소음이요 수면방해죄를 들먹거리는 요즘 사람들은 과연 그때의 그 사람들을 동네에서 떠들어대는 상식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루 벌어 하루 먹으면서도 저축보다는 돈이 좀 생기면 이웃들을 불러 막걸리며 국수파티를 벌였던 사람들이었다. 한바탕 요란하게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도 금방 해해 웃던 그들은 한 번도 친정에 간다고 보따리 싸는 걸 못 봤으니 말없이 자기 고집 속에서 줄다리기만 하는 신경쇠약증상의 요즘사람들에 비하면 오히려 행복했으리라.

어이 학생도 이리 나와. 공부도 쉬어가면서 해야 돼.”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나였지만 그들은 나를 잘도 끼워주었고 그때는 나도 제법 신이 나서 떠들어대기도 하였다.

그 사람들.

그때의 낙수정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학생 나중에 잘 되었다고 여기 잊어버리고 우리들 못 본 체하면 안 되네.”

몇 번이나 당부를 받았는데 십여 년이 지나도록 찾아가보지 못했으니 나는 얼마나 무심한 사람인가.

딱 십년만 도시에 나와 돈을 벌어 고향인 진안 부귀에 가서 논밭을 사서 다시 농사를 짓겠다던 기우아저씨를 십 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찾아갔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나도 당신들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말할 기회를 놓쳐버렸으니 이를 어찌할꼬. 무심하고 냉혹한 놈이라고 얼마나 섭섭하게 생각하며 이곳을 떠났을까.

삼밭의 쑥대였던가.

비위가 없어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였던 나를 그 때 그 자리에 끼워주어 사람들과 어울리게 해주었고 동네 사람들의 훈훈한 인심을 보여주던 사람들이었는데 그곳을 떠나면서 난 도로 들판의 쑥대가 되어버렸다.

놓쳐버린 것에 대한 미련은 이토록 애틋한 것인가. 행여 어디서 그 때 그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으려나 싶어 시내를 걸을 때는 두리번거리기도 하지만 한 사람도 나타나 주지 않는다.

이제 낙수정 사람들은 내 마음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리운 제2의 고향 사람들이 되었다.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그 사람들.

정말 꼭 한 번만이라도, 한 사람만이라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내 생전에 한 번 올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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