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수채화
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김규원
  • 승인 2019.10.24 14: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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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김 영 숙 /수필가
김 영 숙 /수필가

언제부터인가 비 오는 날은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날이 되었다. 좋은 날에 있었던 일은 좋은 날 잘 떠오르지 않는데, 왜 하필 비 오는 날 있었던 일은 비만 오면 어김없이 떠올라 유난히 그때의 추억이 많은 것처럼 느껴져 물길처럼 생각의 골이 깊어지는지 모르겠다.

비도 오는데 파전에 막걸리나 한잔할까?”

지인들도 비만 내리면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거나 전화를 한다. 그러자고 답을 보내면 누구랄 것도 없이 당연히 안주는 실과 바늘처럼, 아내와 남편처럼 전이 된다. 지글지글 전을 부칠 때 나는 소리가 빗물이 땅에 부딪혀 나는 소리와 많이 닮아서일까? 과학적으로 따져보더라도 비 오는 날 밀가루 음식이 당기는 데는 이유가 있단다밀가루는 몸에서 열이 나고 답답한 증상을 없애며 갈증을 해결하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비 오는 날 먹으면 한낮 높은 습도와 열기와 지친 몸의 열기를 식힐 수 있다. 비 오는 날 밀가루 음식과 6도가량의 막걸리는 보약인 셈이라고도 한다. 막걸리 역시 우울한 기분 해결에 효과가 있다. 내 고향 강원도에서는 밀가루 대신 감자를 강판에 갈아 호박과 매운 고추를 넣고 감자 부침개를 부쳐 먹거나 메밀 전을 해 먹곤 했는데, 지역에 따라 다소 재료의 차이는 있어도 부침개를 해 먹는 먹을거리 문화는 비슷비슷하다.

비 오는 날의 기억 또한 그렇다. 지붕에서 뚝뚝 떨어지는 낙숫물을 보면 어릴 적 추억이 함께 빗물 속으로 끼어든다. 가을날 마당에 고추나 곡식을 널어놓고 비 오면 걷으라는 부모님의 당부를 잊은 채 노는 데만 정신 팔다가 소나기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운동회 때 100m 달리기할 때보다 더 빠른 아니, 우사인볼트 만큼 빠르게 뛰어 곡식을 걷곤 했다.
감성도 그랬다. 이유도 없이 센티 해져 비를 흠뻑 맞고 집에 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양말을 벗을 때, 혹은 젖은 옷이 들러붙어 잘 안 벗겨져 한참을 애먹었을 때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나? 잠시 후회하기 일쑤고 그러다가 운 없으면 감기, 몸살로 며칠씩 고생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네가 소나기의 주인공이라도 되느냐? 무슨 청승이냐부모님께 된통 꾸중을 듣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물웅덩이를 치고 지나가는 차에서 분수처럼 뿜어내는 빗물을 몽땅 뒤집어쓰고 생쥐 꼴이 되어도 무엇이 좋다고 서로의 모습을 보며 깔깔거리던 시절이 마치 영화를 보듯 또렷하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며칠째 비가 오락가락한다. 올해 들어 태풍이 몇 차례 다녀갔는데 또 19호 태풍 하기비스가 온다고 한다. 올해 들어 폭우를 동반한 가장 강력한 태풍이 될 것이라며 대비하라는 재난문자까지 받고 보니 슬슬 걱정이 앞선다. 이제는 비가 온다고 해도 우산 들고 나가 빗속의 여인이 되는 낭만마저 시들해졌다. 비 젖은 옷가지 빨래가 더 걱정이고, 비 맞아 감기 들까, 농작물은 온전할까? 이러다 큰물 나지 않을까? 걱정이 먼저 앞선다. 낭만이니, 추억이니 감성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인 피해 걱정이 더 앞에 놓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작정 알아서 몸을 사린다는 표현이 적당하다 싶다.

그런가 하면 언제부턴가 장대비보다는 가랑비가 더 좋아졌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지만, 그 정도의 비는 그냥 맞아두고 싶은 충동이 감성을 자극한다. 가랑비는 장대비처럼 직립으로 지상에 내리꽂혀 산산이 부서지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타고 풀잎을 만나면 그 가장자리를 붙잡고 그곳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둘 자리를 잡다 보면 어느새 풀잎에 물방울이 송알송알 잡힌다.

가랑비가 내 삶의 한 자락 같다. 나에게도 한때는 장대비처럼 서로에게 관심이 쏟아지던 격정의 나날이 있었겠지? 아마도 그런 날이 있었으니 결혼도 했을 테지만, 살다 보니 가뭄에 콩 시들 듯 서로에 대해 시들시들해졌다. 한때는 내가 보았던 그 송알송알 풀잎에 맺힌 물방울 보석을 그에게서 보았다. 오랜 시간 서서히 맺힌 정이라는 보석일 것이다. 비록 안개비처럼 보일 듯 말 듯 내려 쌓인 정이지만 깊이가 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강물처럼 도도하지만 범람하지는 않는다. 늘 하늘과 땅의 숙명처럼 멀리서 볼수록 더 정겨운 지평선 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비 오는 날은 인생의 깊이를 가늠해 보는 날이 된듯하다.

그렇게 보석처럼 맺히며 내린 방울들이 졸졸거리며 모여 내 삶의 고랑이 되고 개울이 되어 차츰 넓게 퍼져 마침내 강을 이루는 인생의 뒷자락에 섰다. 이제 돌아보지 않아도 서로를 느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동행의 의미를 가랑비에 젖어 들 듯 조금씩 배우는 재미도 안다. 달리는 시간에 안달복달 하지 않고 그저 그 흐름에 내 삶을 맡기는 요령도 터득한다.

빗방울 흘러내리는 창가에 앉아 홀짝홀짝 따뜻한 차를 마시며 라디오를 켰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노래에 빗소리 버무려 마신다.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 음악이 흐르는 그 카페엔 초콜릿색 물감으로 빗방울 그려진 그 가로등 불 아랜 보라색 물감으로 세상사람 모두 다 도화지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행복하면 좋겠네.~~>

낭만 한 수저, 사랑 한 수저 추억 한 수저 더한 차 맛에 이끌려 모처럼 메마른 내 감성에 화사한 물감으로 덧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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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삼 2019-10-28 09:11:36
낭만 한 잔 마시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