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전주 ‘첫마중길’
길 잃은 전주 ‘첫마중길’
  • 전주일보
  • 승인 2019.10.2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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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길인가, 도로인가?

전주시가 의욕적으로 조성한 전주역 일대 첫마중길에 대한 비판이 증폭되고 있다. 기존의 8차선 백제로의 차선과 인도 폭을 줄이고 중앙분리대를 더해 조성한 경관길이 도로도 아니고, 길도 아닌정체불명의 애물단지가 돼 버렸다는 지적이다.

실제 조성 3년째를 맞은 첫마중길은 축제와 주말공연 등 활성화를 위한 전주시의 노력에도 좀처럼 시민들의 발걸음을 끌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도로는 도로대로 기능이 위축돼 운전자들의 불만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수십억대의 예산을 투입한 사업이 당초 기대와 달리 죽은 공간이 돼 버린 모습이다.

 

걷고 싶지 않은 죽은 공간

 

첫마중길은 왜 시민들의 외면을 받고 있을까? 즉각적으로 기본을 망각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도시설계의 핵심인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치게 상상력에 매몰된 행정의 태도가 지금의 공간을 연출했다는 소리가 무성하다. 구체적으로 걷고 싶은 길에 대한 성찰이 부족해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진단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과 차량이 다니는 공간을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해 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도시의 길은 사람이 다니는 ()’와 차량이 이동하는 ()’로 분류된다.

이런 관점에서 개념만으로 따지면 첫마중길은 명칭이 말해주듯 에 해당한다. 하지만 길이 채워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직시하면 길이라고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로 애매한 공간이 되고 있다.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고, 분수대가 설치되고, 시민의 성금을 더해 나무까지 치장한 뒤 공연과 축제를 벌이는데도 왜 여전히 길로써의 온당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을까?

도시 전문가들은 길이 성공적인 공간이 되려면 두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고 분석한다. ‘이벤트 밀도공간의 속도.

이벤트 밀도는 보행자가 걸으면서 체험할 수 있는 구경거리를 말한다. 골목과 가게, 자연경관과 역사적인 건축물 등이 이벤트에 해당한다.

공간의 속도는 걸으면서 느끼는 편안한 마음과 직결돼 있다. 걷는 속도와 차량속도, 앉아서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카페 등이 종합해서 그 속도를 결정한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저자인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고 교수는 이벤트 밀도의 공식을 ‘2n’, 공간의 속도를 물리학의 운동에너지 법칙 ‘E=1/2×질량×속도의 제곱으로 산출한다. 체험거리가 많을수록 승수로 증폭되는 이벤트 밀도가 높을수록, 보행자와 차량의 속도를 망라한 공간의 속도가 사람의 평균 보행 속도인 시속 4km에 가까울수록 거리는 걷고 싶은 길이 된다는 분석이다.

이 간단한 공식은 첫마중길에 사람들이 왜 모여들지 않는가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거리에 가뜩이나 매력적인 명소가 없는데다 보행자의 공간인 길과 인도가 도로에 막혀 이벤트 밀도가 크게 떨어져 있다. 여기에 길 양쪽으로 제한속도를 늦췄다고 해도 전주의 기간도로를 차량들이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으니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구도를 띠고 있다.

 

도시행정의 기본 망각

 

전주시는 왜 이런 길을 기획했을까?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왕복 8차선에 대로에 걸맞는 교통량을 확보하지 못해 도로가 활력을 잃었고, 그러다보니 주변 상권 또한 활기를 띠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전주역은 전주의 주요 관문 중 하나다. 도시 이미지와 직결되는 관문을 가꾸는 작업은 상징성 확보와 관련이 있다. 일거삼득의 핫플레이스를 창출하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배경이다.

이 점에 있어선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조차 대부분 핵심을 망각했다는 지적을 덧붙인다.

먼저 사람이 다니는 양쪽 인도와 분리된 구도가 마치 외딴 섬처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차량이 뿜어내는 매연과 소음의 한 가운데에 사람을 들이겠다는 점에선 환경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시간에 맞춰 출퇴근을 하는 시민과 역으로 향하는 여행객들에겐 이동 속도를 지연시켜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는 시선도 따갑기 그지없다.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도시의 미래를 설계할 행정이 전주의 중장기 발전 흐름을 간과했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전북의 동부권에서 밀려드는 차량 흐름을 원활하게 소통시키려면 동전주 IC에서 첫마중길 인근으로 새 도로를 내야하고, LH가 추진하는 20만평 주택단지가 조성되면 교통량이 폭증할 판에 오히려 미래의 도로 수요에 역행하는 도시행정을 펼쳤다는 지적이다.

 

확증편향이 낳는 도시 약탈

 

정치공학도 엿보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청계천 복원사업과 박원순 서울시장의 하늘공원이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로 전국적인 관심을 끌자 전국의 지자체장들이 앞 다퉈 한건주의식 과시행정을 펼치고 있다. 전북의 경우 송하진 지사가 전주시장 재임 시절 정계천의 축소판인 노송천 복원사업을 펼쳤고, 김승수 현 전주시장은 하늘공원의 아류 격인 첫마중길을 선보였다. 하지만 두 사업 모두 겉치장만 요란한 채 시민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탄식을 자아내고 있다.

첫마중길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매년 예산을 쏟아 붓는 축제에 이르면 전주시정의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bias)마저 보게 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어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 확증 편향이다. 지방자치 운영자의 확증편향은 고스란히 주민들의 고통과 부담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전주시가 지금이라도 현실을 직시해 개선에 나설 수는 없을까?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첫마중길을 공원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마중길 공간을 차라리 도시숲으로 가꾸는 개선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첫마중길에 가해지고 있는 비판 뒤로 미국의 도시학자 제인 제이콥스의 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들이 살지 않은 공간에 대한 계획과 개발은 도시 재건축이 아니라 도시 약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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