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청
환청
  • 김규원
  • 승인 2019.10.17 14: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 고 운 /수필가
김 고 운 /수필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이병에 가득히 넣어가지고요/라라라라 라라라라/온다야.”

 

요즘 며칠째 내 귀에서 들리고 있는 노랫소리다. 솔직히 나는, 중년의 사내들 5~6명이 합창으로 부르는 듯 울리는 이 동요가 정확히 언제부터 들리는지조차 모른다. 오늘 새벽에 갈증에 잠이 깨어 물병을 더듬다가 귀에서 제법 큰 소리로 들리는 이 합창을 들었다. 이게 적어도 며칠 동안 들려온 소리라는 생각도 어쩌면 내 귀의 환청처럼 환상(幻想)일 수 있다. 노랫소리는 크게 들리는 듯하다가 가물가물 멀어졌다가 다시 크게 들리고 해서 종잡을 수 없다. 의문의 합창 소리를 귀에 두고 잠을 청하다가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이 환청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이다. 새벽 5시다.

 

내 귀에 들리는 이 노래는 어쩌면 초등학교 저학년쯤에 배웠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 가사가 맞는지 곡조나 박자가 맞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도, 평소에 이명(耳鳴)으로 들리던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를 배경 삼아 이 동요가 눈 내린 날 들리는 소리처럼 멀고 아련하게 들리고 있다. 귀에 난청이 시작되면서 이명이 생겼다. 아니, 이명이 생겨 난청이 왔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 나무로 된 전신주에 귀를 대고 들으면 찌이잉-’하고 들리던 그 울림소리와 고속윤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내 귀의 단골 이명이다. 그 소음들은 평소에 의식하지 않으려 애쓴 보람인지 낮에는 거의 잊고 산다. 그러나 밤에 자다가 깨면 굉장한 소리로 들리면서 이렇게 가끔 어떤 노래의 환청이 함께 들린다. 제법 오랫동안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라는 봉선화가 들렸고, 대개 슬픈 가락의 단조 노래가 들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곡조가 동요로 바뀌어 들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동요의 리듬이 애절한 가락보다는 좋다는 느낌이다.

 

가사 내용의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 것인지 강으로 가야 하는지라는 이 의문은 평생 나를 번민하게 한 삶의 화두(話頭)이다. 바다에 가서 크고 맛있는 고기를 잡고 싶지만, 바다에 이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았다. 바다는 거칠고 배를 타지 않으면 좋은 고기를 만나기 어렵다. 어렵게 바다를 찾아가더라도 물때가 맞지 않으면 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많은 세월이 소모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바다를 동경하고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아도 바다를 향해 달렸다.

바다를 찾아갈 형편이 되지 못하면 냇물이나 저수지를 찾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바닷고기의 비린 맛과 민물고기의 비린 맛이 다르듯, 선택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그때마다 다른 맛을 보여준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각자의 몫이지만, 그 결과가 미치는 파장은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사물에 큰 영향을 끼친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의 선택은 거의 정답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정답이 아닌 것을 알면서 오답에 동그라미를 쳤다고 해야 옳다.

내 알량한 머리를 믿고 초중고 12년 동안 책은 받아온 첫날 모두 훑어보고 학교가 파하면 펼쳐보지 않았다. 뭔가 신기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노는 데만 정신을 팔았다.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하려던 참에 군사쿠데타의 날벼락을 맞아 집안이 풍비박산되고 실의에 빠져 선택한 공무원의 길도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제대 후에 복직하여 벽촌에서 동료로 만나 선택한 결혼도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 억지를 부린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고백한다. 뭐든 내가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치기(稚氣)를 실력이라고 믿었던 어리석은 지난 선택에 대한 비웃음이 고기잡이라는 동요로 내 귀에 들렸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니 내 귀에 들린 노래는 반달’ ‘따오기등 수많은 동요를 지은 윤극영 선생이 만든 고기잡이라는 동요다. 제목도 만든 이도 모르던 동요가 귀에 생생하게 들려온 일은 내 마음에 웅크리고 있던 선택의 후회가 환청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결혼처럼 평생을 좌우할 선택, 길을 가다가 갈림길을 만나 맘 내키는 쪽을 향하는 사소한 선택까지 일생을 선택하며 살아왔다. 아주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선택도 삶에 커다란 전기가 될 수 있다.

 

내 선택은 항상 나쁜 결과로만 향하여 왔고, 그 결과는 오늘 외로운 노인이 되어 독거노인의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언제나 감성에 의지하여 판단하고 논리적이지 못한 자기합리화와 변명으로 이어온 삶의 아픈 줄거리들이 날 괴롭게 했다. 아마도 그러한 마음들이 노래의 환청으로 들리고 있을 것이다. 상당한 동안 들려오던 봉선화는 노년의 아쉬움이 표출된 것이었고 요즘에 들리는 고기잡이동요는 아마도 나 자신의 어리석은 삶을 자조(自嘲)하는 또 다른 나의 질책(叱責)일 터이다.

 

이명이라는 괴로운 귀 질환도 오랜 시간 내게 머물게 되니 조금은 친숙해졌다. 처음엔 미칠 것처럼 괴로운 소리였는데,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거듭되다 보니 들리지 않는 듯 잊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제는 노래 환청으로 내 마음의 상태를 들려주고 있다. 하지만, 이제 슬픈 단조의 노래나 잘못된 선택을 비웃는 고기잡이도 그만 듣고 싶다. 힘들고 답답한 노년의 안간힘이 아닌, 어떤 이처럼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행복합니다.’라는 노래가 매일 아침 어디선가 들리도록 열심히 살아보련다.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꽃을 피우는 노력이라도 하다가 보면, 봄바람에 실려 온 작은 씨앗이라도 싹을 틔울 수 있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