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는다면
역사를 잊는다면
  • 전주일보
  • 승인 2019.10.1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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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 /논설위원
이 현 재 /논설위원

조국 사태가 법무부 장관직 사퇴로 매듭지어졌다. 장관 후보로 지명된 후 국론이 찬반 양반으로 분열된 지 67일만의 종국이다.

해방정국 이후 가장 첨예했던 진영대결이라는 탄식마저 자아냈던 만큼 그의 사퇴가 자아낸 충격파도 적지 않다.

조국 정국은 그가 지닌 정치적 함의를 감안할 때 사퇴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진행형의 성격을 갖는다. 불과 두 달여 만에 크게 변한 여론지형은 경제 문제까지 덧대져 6개월 후로 다가온 내년 총선은 물론 차기 대통령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권의 위기극복 능력 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른다. 그 관건은 문 정부의 역사와 정의에 대한 인식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되풀이 되는 정권들의 소극(笑劇)

역사의 문법은 특이하다. 과거형의 시제로 오늘과 내일을 지시한다. 그러나 역사를 자주 소환하고 입에 올리는 위정자들은 역사의 시침에 얼굴을 돌리고 살아간다. 비극은 거기서 태동한다.

역사를 규정하는 아포리즘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수하다. 그 중에서 E. 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 첫 번째로 답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은 조국 정국의 정곡을 찌른다. ‘역사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 때 같은 원인에 같은 결과가 되풀이 되는 인과의 고리를 인류는 수없이 경험했다.

그 망각의 저편에서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는 헤겔의 경고음이 들려온다. 헤겔에 더해 카를 마르크는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farce)으로라는 말을 덧붙였다.

실제 1987년 민주항쟁 승리 이후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한국의 정치사는 숱한 비극과 소극의 연속이었다.

김대중·김영삼의 분열이 초래한 1987년 노태우 대통령 당선은 비극이자 소극이었다. 그토록 많은 피로 쟁취한 대통령직선 권리의 행사 결과가 군부독재 정권의 계승자의 승리로 귀결된 것은 소극성 비극이었다.

이어진 김영삼·노태우·김종필의 ‘3당 야합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소극이었다. 국민통합의 왜곡된 명분으로 정권욕을 채웠지만 그만큼 국민들의 절망감과 좌절감은 부풀어 올랐다.

지금도 잊지 못할 비극은 노무현 정권의 정권 재창출 실패다. 역대 어느 정권보다 선의와 신념이 넘쳤지만 결국 정권을 내줘 10년의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국민들은 그 어둠을 촛불로 밝혔지만 문재인 정부가 뿌리에 해당하는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얻었는지는 의문이다.

실족의 첫 째 요인은 도덕적 면허 효과에 대한 과신이다. 사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그 대가로 합당한 공직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 희생과 헌신으로 국가와 사회를 진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독선과 오만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자기 객관화의 성찰을 거두고 자리에 취해 권력과 함께 낡아간다. 그러면서 권력과 함께 낡아가며 기득권으로 전락한다.

문재인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이른바 386세대에게서 그 변질된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들이 청산의 대상으로 내모는 이른바 적폐세력과 같은 행동, 같은 말을 토해내면서 우리는 옳다는 내로남불이 30년도 넘은 과거에 집착하는 과거팔이의 기승이다.

정책 능력도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다. 모순으로 점철된 근현대사로 인해 우리 사회 곳곳이 병들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모순은 혁명을 잉태하지만 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은 개혁을 통해 병폐를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양극화 해소를 국정의 큰 틀로 잡은 것은 방향만 놓고 보면 올바른 설정이다. 하지만 정책 추진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너무 많이 튀어나오고 있다. 정책이 낳을 부작용을 예견하면서 미리 보완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땜질식 방편들을 양산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 선한 목적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 같은 그 차이를 신념에 집착하는 정치인은 선이 악을 낳을 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분명한 것은 국민들의 심판

역사는 좀처럼 알몸의 해법을 보여주지 않는다. 눈과 마음이 어두우면 역사도 미로일 따름이다. 정의 또한 마찬가지다. 여간한 의지로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한 때는 참신했던 사람들의 정의도 기득권의 정의로 전락한다.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는 오랜 철학적 논쟁거리였다. 소피스트 칼리클레스는 도덕이란 강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약자가 발명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약자들은 부정직이 부끄럼과 부정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경우 부정직은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을 의미한다. 그들은 스스로 열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남들과 동등하기만 하면 더없이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힘을 가진 자(초인)가 있다면, 그는 이 모든 것을 깨뜨려버리고 탈출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강자의 기득권적 정의일 뿐이다. 그 인식의 사각지대를 문재인 대통령이 평등과 공정의 정의로 채우겠다고 약속해 국민으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수많은 주요 인사들은 보통 국민들은 상상도 못할 편법을 행사하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도 도덕과 양심에 비춰 부끄럽게 살아오지 않았다”, “법과 제도를 따랐다고 천연덕스럽게 강변하고 있다.

난감한 것은 국민들이다. ‘강남 좌파를 자임하는 그들이 여전히 독재에 항거했던 민주화 세력인지, 권력에 취해버린 기득권 세력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참신했던 시절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냉정한 심판의 칼을 휘두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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