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미소, 큰 행복
작은 미소, 큰 행복
  • 전주일보
  • 승인 2019.09.2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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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문 광 섭 /수필가
문 광 섭 /수필가

추석 안날이다. 아내가 한나절 동안 정성스레 송편을 빚었다. 딸집에 송편을 보내주라는 아내의 심부름을 하러 나섰다. 평소보다 많은 차량과 사람들로 붐볐다. 도립국악원 사거리에서 동물원 쪽으로 좌회전하려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옆 차로에 대기 중인 삼륜차가 눈길을 끌었다. 오랜만에 보는 삼륜차인데다 오토바이를 연결한 차여서 새롭게 보였다. 더욱 눈에 뜨인 것은 적재함에 폐휴지를 가득 싣고 그 위에 머리에 수건을 쓴 아내가 운전하는 남편 뒤에 다정스럽게 다가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신호가 열려 좌회전하면서 삼륜차 앞을 지나는 순간, 내외가 얼굴을 가까이 마주 보며 무슨 말인지 하면서 싱그레 웃었다.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미소가 흘렀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내외, 얼굴은 햇볕에 그을린 데다 땀자국이 흐른 모습이 연극에서나 볼법한 얼굴이지만, 그들이 지은 꾸밈없는 미소는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이 세상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순수한 사랑, 부러울 것 없는 행복이 넘치는 순간. 불과 2~3초의 시간에 보인 그 영상은 낚시에서 대어를 낚았을 때의 기분과 흡사한 흐뭇함을 느끼게 했다.

 

딸네 집에 가는 내내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며 그렇게 행복한 표정과 미소가 얼굴에 번졌을까 하는 궁금증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호성동 뜨란채아파트 앞에 이르렀을 때, 젊은 내외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아이 둘을 데리고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오라! 저거였네.’ 삼륜차 부부가 나눴을 대화가 금세 짐작되었다. 젊은 부부의 모습에서 내가 국악원 사거리에 대기 중이던 당시, 횡단보도 위를 걷던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손잡고 건넜던 순간이 기억되어서다.

아마 삼륜차 부부도 젊은 부부와 아이들을 보면서 추석을 쇠러 도착할 손자들과 자녀들 생각했을 것이다. 삶의 질곡 속에서도 자손들이 찾아오는 기쁨 만 한 일이 또 있던가. ‘여보! 우리 애들도 지금 내려오고 있겠죠?’ ‘그럼, 어서 갑시다.’ 뭐 그런 말을 하며 행복해하지 않았을까. 가족, 자손, 그 이름만으로 마음이 푸근해지고 그리움이 돋는 추석 무렵의 정()이다. 그 부부의 행복한 미소의 근원을 알아내면서 내 기억의 갈피 속에 잠들어 있던 또 하나의 영상 하나가 오버 랩 되어 나를 반세기 가까운 세월 저편으로 돌아가게 했다.

 

내 삶의 여정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자면 자연히 신혼 무렵에 살던 진북동 집이 떠오른다. 비록 13평짜리 재래식 한옥이었지만, 부족하거나 부러워할 일이 없던 때. 그 집에서 아이 셋과 함께 살던 시절이 제일 행복했었지 싶다. 특히 딸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몇 해는 내 인생에서 행복의 절정이었다. 나는 요즘 말로 완벽한 딸 바보였다. 말을 배워 아장거리며 아빠를 부르는 모습이 날마다 눈에 선하니 떠올라 출근할 때나 퇴근하여 딸아이와 눈을 맞추는 일보다 더한 행복은 없었다. 아울러 그 무렵에 오늘의 삼륜차 부부처럼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또 하나의 아름다운 정경을 잊지 못한다.

 

그 시절에는 연탄으로 취사와 난방을 해결하던 때였다. 연탄공장에서 생산된 19공탄은 각 동네 연탄 가게를 통해 각 가정에 배달되었다. 도로 사정도 안 좋고 좁다란 골목길은 리어카로 운반하였다. 산자락 비탈진 가옥은 일일이 등짐으로 져 날랐다. 우리 집 골목길은 비교적 완만했으나 큰 도로에서 들어오자면 경사지고 땅이 고르지 못한 곳이 몇 군데 있어 힘이 들었다.

어느 날 리어카로 연탄이 들어온다 하여 딸아이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대문 앞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당신, 힘들었지!” 하고 아내가 말하자

아녀, 당신이 고생했지!” 라고 남편이 받았다. 남편이 리어카를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고 온 모양이다. 얼른 대문을 연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내외의 얼굴은 연탄재가 묻어 흑인처럼 까맸지만, 하얀 이를 내놓고 웃으며 연탄을 나르는 두 사람의 표정은 행복이 넘쳐나 보였다. 그들의 얼굴엔 까만 연탄으로도 감출 수 없는 사랑과 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어디선가 정겨운 모습을 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그림이다.

 

그 뒤에 살림이 늘고 열심히 살면서 그런대로 어려움 없이 살았지만 아이들을 키우며 알콩달콩하며 살던 시절이 제일 그립다. 세 아이도 학교를 마친 뒤 오래전 결혼해 따로 살고 있어서 우리 내외만 산 지도 20년 가까이 되었다. 돌아보니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처럼 함께 부대끼며 살던 때가 좋았고, 재미도 함께 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외려 집이 협소하고 손이 시려 호호 불던 시절이 행복했지 싶다. 풍요로움과 행복이 비례하지는 않았음을 새삼 느낀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물질의 풍요와 개인주의는 대가족제도를 무너트리며 가족공동체를 해체해버렸다. 어렵게 살며 서로를 염려하던 연대의식과 위계질서도 무너져 버렸다. 눈빛과 작은 미소를 통하여 서로 공감하고 우애를 나누던 끈끈한 정리(情理)가 증발해 삭막한 세상으로 변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떤 이들은 작은 데서 행복을 찾아내고 소중하게 갈무리한다. 오늘 내가 만난 삼륜차 부부의 다정한 시선과 가난 속의 행복, 자손을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을 엿보며 행복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볼 수 있었다. 행복은 우리 안에 서 언제든 피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발견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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