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에서
기찻길에서
  • 전주일보
  • 승인 2019.09.05 15: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수필
김 영 숙 /수필가
김 영 숙 /수필가

기찻길은 함께 갈 수는 있지만, 서로 마주 바라볼 뿐 만날 수는 없다. 평생 나란히 가며 열차를 실어 날라야 하는 것이 운명이다. 행여 이를 어기고 서로 만난다면 철로만 의지 한 채 달리던 열차는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열차를 실어 날라야 철로의 삶이 굴러가는 것이다.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에는 숱한 사람들의 기쁨과 즐거움, 아픔, 슬픔이 실려 저 먼 곳으로, 또 다른 시간 속으로 간다. 기찻길은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르면서 공감하고 동화하며 가는 것이다. 그래서 기찻길에서는 사람들을 빽빽이 싣고 쉬엄쉬엄 가는 완행열차에 서린 추억도 있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급행열차에 대한 다급함도 볼 수 있다.

내 학창시절 대부분 통학수단은 전철이었고 주말에는 청량리에서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구절리역까지 가는 열차를 타고 고향을 오갔다. 지금 구절리역은 폐역이 되었고 아우라지로 더 유명한 여량역까지 아름다운 계곡과 강을 따라 달리던 비둘기호 열차가 멈춘 지는 벌써 십여 년이 넘었다.

광산촌 구절리역에 이르는 기찻길에 대한 기억은 가난이 일반화하여 가난인지조차 모르던 시절의 아픔이 되레 아련한 그리움으로 돋아나게 한다. 무임승차가 자랑이던 그때, 찻간에서 역무원과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며 검표하는 차장도, 표 내는 곳에서의 삼엄한 절차도 강산이 두 번 바뀐 지금은 모두 그립고 정겨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대개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승객이래야 자신보다 더 커다란 짐 보따리를 끌고 타고내리는 5일장 장돌뱅이들, 통학생, 그리고 구절리 광산을 오가던 광부가 대부분이었다.

열차가 산과 들을 지나고 강을 따라 달리는 그 상쾌함도 싣고 터널도 지나고 기찻길 옆 마을의 사연도 담으며 달리던 길이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아 숱한 사연도 더는 들을 수 없지만, 레일바이크 관광지로 거듭나서 행복에 들뜬 사람들이 타는 네발 자전거에 자신을 내주었으니 기찻길은 서운할 일도 아쉬울 일도 없으리라. 사람들은 생소한 레일바이크를 타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가족의 소중함을 배우며 또 다른 추억으로 인생에 밝은 색칠을 해가며 살아갈 테니 말이다.

기찻길만 봐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저 멀리 바다로 향하는 여수행을 타도 좋고, 산속 계곡을 굽이쳐 달리거나 호수를 옆에 끼고 달리다가 그 어디쯤에서 느릿느릿 달리는 기차로 환승해서 호젓한 간이역에 내려 걷는 낭만은 어떤가? 들꽃들이 반겨주는 아주 작은 간이역이면 더 좋겠다. 왠지 간이역에서는 시간이 더디 갈 것 같다. 스치는 바람과 구름도 서두르지 않는다. 부리나케 지나가는 고속철도의 속도에 압도당하는 일보다 얼마나 홀가분하고 여유로운가? 그건 아마도 스치고 지나간 것들에 대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다시 숨을 고르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도움닫기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기찻길은 기차만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람과 자연 사이를 그리고 시간과 시간 사이를 이어주는 오지랖을 가졌다.

요즘은 기차가 자꾸만 빨라지는 고속철도 시대이다. 산을 뚫은 터널을 지나 곧게 편 길에서 전기를 먹고 더 빨리, 더 많이 태우고 달려간다. 시골의 기찻길은 한적하다 못해 적적해지고 간이역으로 남는 역이 점점 늘어난다. 임실역에는 상하행선 모두 합쳐서 하루에 6회 정도 기차가 정차하지만, 고속열차는 쳐다볼 새도 없이 그냥 지나친다.

과연 기찻길이 모두 직선이 되고 그만큼 열차가 빨라진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그 속도만큼 풍요롭고 행복해질까? 빠르게 달리면 달릴수록 밖의 세상 풍경을 다 담기에는 우리의 눈길이 턱없이 느리다.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리운 것들이 별로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득 빠른 열차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 기억이라는 수많은 인생의 정류장에 간이역처럼 잊혀 가고 낡고, 닳아지는 것은 없는지 돌아본다.

다디단 오수 같은 정적에 빠져 있는 사이 여수행 기차가 철로를 녹이듯 내리쬐는 햇볕을 딛고 천천히 임실역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멈춤은 잠깐이다. 최대한 빨리 달리는 것 그것이 목표인 양 두서너 명의 손님을 태우고 내리더니 바삐 떠났다. 두고 간 철길만 더 길게 남아 아지랑이 같은 열기를 뿜어낼 뿐이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흘려버린 소중한 추억들이 숨 가쁘게 다시 내 곁으로 달려 들것만 같아서 쉰다섯이라는 내 인생 열차를 가만히 그 위에 세워본다. 뒤뚱거린다. 긴 세월 늘 곁에 있어 소중함을 몰랐던 사람들의 얼굴이 완행열차처럼 천천히 스쳐 간다. 철로가 있어야 기차가 달릴 수 있듯이 나는 그들이 있었기에 존재했다. 길은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니라 멀고 험한 길일수록 함께 가는 것이고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높낮이를 따지지 않으며 삶을 실어 나르는 데만 집착하지 않고 나란히 함께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깨우쳐 준다.

이 또한 언젠가는 사무치게 그리운 풍경이 되리니, 이제는 나란히 동행할 수 있어 행복하고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운 그런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아보리라. 나란히 가며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철길처럼 중심을 잘 잡으며 사랑과 행복의 소실점을 만날 그날까지 살아보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