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래?’ 그리고 ‘그래도’와 ‘차라리’
‘어쩔래?’ 그리고 ‘그래도’와 ‘차라리’
  • 전주일보
  • 승인 2019.08.28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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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 논설위원
이 현 재/ 논설위원

세상사야 어떻게 돌아가든 천체의 운행은 만고에 변함이 없다. 폭염지수는 올해도 기록을 경신하며 지구 환경에 경종을 울렸지만 문득 오동잎 하나 떨어진다. 가을이다.

계절의 순환은 무한 감상을 자아낸다. 지구의 공전이 동지에 이르러 음()이 극에 이르면 쌀알만 한 양()이 일어나 하지로 향하니 초동(初動)의 일양(一陽)이다.

양이라고 언제나 승승장구 할 수는 없을 터다. 춘분에 이르러 음양이 균형을 이루고 하지에서 양이 최고조에 이르면 초음(初陰)이 생성돼 다시 추분에서 균형을 맞추고 동지를 향한다.

하지만 자연의 변증법은 무리가 없다. 음양에 맞춰 만물은 자기변용(自己變容)을 하면서 생명을 꽃피우고 휴식을 취하며 삶을 구가한다.

그러나 인간의 변증법은 종종 참극을 유발한다. 순리를 거슬러 영원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기득권을 고집하는 탓이다. 그리하여 낡은 것과 싸우면서 새 것도 낡아간다. 한때는 정의로웠던 사람들도 권력을 움켜지면 불의를 닮아간다.

-권력과 함께 낡아가는 정의

가을의 길목에서 봄을 노래한다. 여몽령(如夢令)은 당() 대에서부터 시작된 악보체의 중국 문학 장르다. 중국 송() 대의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의 여몽령은 그중에서도 절창이다. 녹비홍수(綠肥紅瘦)’는 마지막 구절을 화룡점정으로 장식하는 이청조 여몽령의 백미다.

昨夜雨䟽風驟(작야우소풍취)/ 濃睡不消殘酒(농수불소잔주)/ 試問卷簾人(시문권렴인)/ 道海棠依舊(각도해당의구)/ 知否(지부)/ 知否(지부)/ 應是綠肥紅瘦(응시녹비홍수)’

간밤에 비는 드문드문하고 바람은 몰아치는데 단잠을 자고나도 숙취는 여전하다. 발을 걷는 이에게 물어보니 해당화는 그대로란다. 하지만 시인은 아는가, 모르는가, 잎은 무성해도 해당화는 시들고 있으리라고 감회에 젖는다.

녹비홍수를 잎의 녹음이 무성해지면 한때 붉은 자태를 자랑했던 꽃은 시든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꽃의 자태가 극에 달하면 시들면서 짙어진 녹음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은 자연의 변증법이다. 그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이 토인비의 창조적 소수가 반드시 갖춰야 할 통찰의 덕목이다.

얼음장 아래 흐르는 물소리에서 생명의 봄을 준비하고, 오동 낙엽 한 잎에 위기의 겨울을 대비하는 그들로 인해 문명은 도전에 성공적인 응전으로 발전을 지속한다.

평범한 국민들이야 그런 통찰이 무슨 필요 있을까. 저마다 일상에 충실하면 그만일 터다. 그렇지만 국정의 주역들은 달라야 마땅하다. 봄이 오는데도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가을을 눈앞에 두고도 계절의 변환에 둔감하다면 국가와 사회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어떤 정의인가에 대한 물음

정치의 계절로 따지자면 촛불혁명은 국민의 힘으로 만들어낸 봄이었다. 수백만 시민이 한 명, 한 명 가냘픈 촛불의 온기를 모아 10년 가까이 계속됐던 혹한을 녹이고 어둠을 밝혔다. 그리고 그 봄의 영광과 환희를 온통 문재인 정파에게 안겨줬다. 이는 새 정권이 불의를 청산하고 정의를 세울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의는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다. 우리가 정의를 말할 때 자유, 평등, 박애, 공정, 선 등의 절대가치를 떠올리지만, 그 잣대는 각자가 서 있는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힘이 곧 정의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한 소피스트 트라시마쿠스를 떠올려보자. ‘자기가 절름발이이기 때문에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하는 약자를 나는 정녕 여러 번 비웃었다고 험담을 마다하지 않은 니체도 있다. 독일의 반() 국가주의 철학자 막스 슈티르너는 그 사상을 가방에 가득 찬 정의보다 한줌의 권력이 낫다고 간결하게 표현했다.

따라서 어떤 정의냐가 핵심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물음에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평등과 공정, 정의의 주춧돌을 놓는 과업은 누구의 소임일까? 말할 것도 없이 정의롭고 도덕적인 지도자의 몫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과업의 적격자를 발탁하는 기준으로 대선 후보 시절 5대 인사원칙을 천명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여기에 민정수석 시절 두 가지 기준을 더해 ‘7대 원칙으로 강화했다.

-정권 재창출이 최대의 개혁

하지만 1기 내각에서부터 원칙이 무너졌다. 그리고 국민들을 향해 한국당이냐, 민주당이냐 양자택일하라며 어쩔래?’라는 물음을 연신 토해내고 있다.

그 물음에 다수의 국민들은 그래도로 답해왔다. 그 배경에는 차마 한국당을 지지할 순 없지 않느냐는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 우려되는 현상은 그래도에서 차라리로 급속히 돌아서고 있는 최근의 여론 흐름이다.

문재인 정권의 역사적 책무는 개혁에 있다. 그러나 개혁은 불가피하게 시간이 소요된다. 정책과 성과 사이에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문 정부의 최대 개혁은 정권 재창출이라는 말이 된다.

그 기반이 조국의 법무부 장관 지명으로 흔들리고 있다. 문 정부는 조국 후보자자 개혁의 적임자라고 강변한다. 과연 그럴까.

문 정부 들어 청문보고서 없이 임명한 장관급 인사가 16명에 이르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웃도는 수치다. 민정수석으로서 그의 능력을 말해준다.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이후엔 총체적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도덕성에 관한 문제다. ‘차라리는 그 능력과 도덕성에 대한 의문이 문재인 정부의 심장부로 돌아서는 조짐에 다름 아닌 셈이다.

24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근의 상황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스승 플라톤이 아카데미아의 혼이라고 불렀던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런 그가 지혜는 플라톤과 함께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서양 철학의 비조인 플라톤도 그런 비판을 받았을진대 하물며 조국이랴. ‘정의와 개혁은 조국과 함께 죽지는 않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정권 재창출이 우선이자 최대의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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