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고 사태의 부조리극
상산고 사태의 부조리극
  • 전주일보
  • 승인 2019.07.2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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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아일랜드 태생의 극작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저녁 시골길 고목나무 아래서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두 부랑자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말장난을 반복하며 극을 끌어간다.

하지만 고도가 누구인지,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이라고 추측한다. 일제강점의 조국 해방을 기다리며 광야에서 이 육사가 목 놓아 부른 초인일 수도 있다. 어떤 목적을 발견하고 자신의 운명을 제어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은 헛될 뿐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던지는 부조리극을 연 대표적인 희곡이다.

오늘 유은혜 교육부 장관의 입을 통해 운명을 가를 상산고 사태를 부조리극으로 재구성한다면 지나친 발상일까.

하지만 한국사회의 심각한 양극화 토양에선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교육 평준화, 공교육 실패의 희생양을 찾는 김승환 교육감의 전북 교육행정, 자사고 폐지를 추진하는 권력층의 언행 불일치가 토해내는 블랙코미디 등 부조리의 모든 극적 요소를 상산고 사태를 통해 볼 수 있다.

@‘교육 평준화구호의 본말전도

왜 상산고 사태가 부조리극인가. 현재의 한국적 상황에서는 교육 평준화는 결코 오지 않을 고도처럼 환상이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적이고 결정론으로 빠져들 우려를 감수하고 상산고 사태를 부조리극으로 재구성해 보자.

1막은 민주주의의 대원칙으로써 교육기회의 균등으로 써 내려진다.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기회균등의 핵심이 교육기회의 균등임을 새삼 언급할 필요 없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갈라진 빈부와 신분에 구애 없이 교육을 받을 기회가 공평하게 보장될 때 민주주의의 양대 가치인 자유와 평등의 양 날개가 펼쳐진다.

세계 최빈국 상태와 독재체제로 출발한 대한민국이 오늘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불가역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교육의 힘이었다. 하지만 그 원칙이 신분 세습의 도구로 무너져 있다. 고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변질한 교육제도가 바로잡히길 염원하는 이들이 한두 명일까.

그러나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교육 평준화는 무망한 신기루일 뿐이다. 그 싹을 틔워낼 토양이 너무나 척박하다. 그 현실을 상산고 사태 부조리극의 2막에서 볼 수 있다. 한국이 왜 학벌 사회인가를 따져 묻는 것은 부질없다. 학벌에 따라 경제적 신분이 확연히 갈라진다. 무엇보다 학벌로 통과한 직장 사이의 임금 격차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다.

21세기 세계자본주의에서 한국은 미국, 일본과 함께 가장 치열한 경쟁 사회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과 미국의 임금 격차도 한국에 비하면 족탈불급이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에 따르면 2017년 기준 한국의 100~499인 기업의 임금은 5인 미만 기업의 2.1배에 이른다. 반면 미국은 1.3, 일본은 2016년 기준으로 1.5배에 그치고 있다. 그 차별의 가장 큰 결정인자가 대학 브랜드다. 그렇다 보니 고교평준화 이후 수많은 정책이 나왔지만, 어느 하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치명적인 양극화 현상의 완화가 전제되지 않는 교육개혁은 2’ ‘3’의 자사고를 배태하거나 한층 더 뜨거워질 사교육 열풍을 예고할 뿐이다.

권력층의 내로남불은 상산고 부조리극의 백미다. 그들의 어록과 행동으로 제3막을 열어보자.

보수 기득권층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대로를 외치는 그들에게 학벌 사회는 기득권 유지를 위한 최선의 환경이다.

하지만 개혁세력의 언행 불일치는 무력감과 절망감을 안겨 준다. 문재인 정부의 조국 민정수석은 딸을 외국어고에 보내놓고 내가 딸을 외국어고에 보내봤는데...”라며 특목고 무용론을 펼쳤다. 교육행정의 수장인 유은혜 장관은 딸의 장래를 위해 위장전입을 전전해놓고 법과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한 적이 없다고 버젓이 말한다.

어디 그들뿐일까. 강남 일반고에 자녀를 진학시킨 이낙연 총리는 오히려 논외의 대상이다. 대다수 장관 자녀들의 고교 이력은 외국어고·과학고·자사고로 치장돼 있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정의롭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만드는 지옥을 설파한 에노모토 히로야기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부실한 전북 공교육 떠넘기기

굳이 부조리극을 4막까지 연장한다면 그 소재는 전북 공교육의 실패가 될 것이다. 건전한 민주사회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동서고금의 수많은 이들이 책임사회를 성찰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이상을 구성할 때 희망하는 바를 가정할 수는 있으나 불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경구를 남겼다. 공자 또한 군자는 행위로 말하고, 소인은 혀로 말한다고 설파했다.

구호만 요란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 위정자에 대한 경구는 끝없이 이어진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써 정치>를 통해 신념에 집착하는 정치인은 선이 악을 낳을 수 있음을 인식하는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는 경고음을 던졌다.

연간 수업료가 1,000만원을 웃도는 상산고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심각한 교육 대물림으로 신분 상승의 기회를 근원적으로 박탈하고 있는 부러진 사다리의 한국 사회 부조리를 모르쇠 하고 싶은 마음 또한 추호도 없다. 그러니 학벌 사회의 온상인 양극화 사회를 뿌리부터 개혁해내야 한다. 그것이 중장기적 과제라면 우선 공교육부터 정상화해야 한다.

그러나 전북 교육행정에서는 그런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수능성적에서 모든 과목의 1·2등급 비율이 전국 평균을 훨씬 밑돌고 있다. 3분의 2가 타시도 학생들로 채워진 상산고를 제외하면 그 비율은 현저하게 낮아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한국사회의 양극화가 이처럼 심각하고 학력으로 따져보는 전북의 공교육이 이처럼 부실한 마당에 자사고 폐지로 교육을 정상화 한다? ‘언 발에 오줌 누기./이현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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