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6’, 전북도민 절망의 무게
-1,166’, 전북도민 절망의 무게
  • 전주일보
  • 승인 2019.07.0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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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14대 심수관이 지난달 1692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끌려가 일본의 도예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심수관가() 14세손의 죽음은 무한 정회를 일으킨다. 이민자 공동체, 디아스포라에 대한 상념이다.

강대국의 약소국 침탈로 점철된 세계사는 영웅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민중사관으로 써내려가는 디아스포라야말로 인류의 애환을 담아내는 진정한 대서사시다. 정복자의 탐욕과 욕망이 빚은 전쟁, 그로 인해 포로와 유민으로 형해화돼 세계를 떠돈 약소민족의 수난, 고난 속에서도 민족마다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해온 인류의 강한 생명력을 듣노라면 장엄하고도 비장한 곡조가 귀를 때린다.

 

디아스포라와 전북향우사회

 

디아스포라를 말할 때 그 결정체로 유대인의 방랑이 떠오른다. BC 586년 바빌로니아 포수 이래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2,500년을 떠돌았다. 급기야 570만 명에 이르는 나치 홀로코스트의 공포시대를 통과한 후 1,450만 명이 남아 310만 명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미국과 소련 등에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다.

지구촌에 디아스포라가 있다면 한국사회에는 향우사회가 있다. 구성과 성격은 다르지만 향우사회 역시 본질은 디아스포라와 유사하다. 척박한 삶의 환경을 떠난 고향 이탈 또한 디아스포라 못지않은 유랑과 고난의 서사시를 노래한다.

엄연한 사실은 향우사회 중심에 전북도민의 이주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구비율로 따질 때 전국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폭발적인 대량이주의 행렬을 이뤘다. 디아스포라의 결정체가 유대인의 방랑이라면 한국사회 고향 이탈의 결정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는 전북도민의 향우사회인 셈이다.

‘1,166’,

가장 최근의 통계인 지난 5월 한 달 동안 전북 사회가 기록한 인구 순유출 수치다. 도내 14개 시군별로 전주를 포함해 모든 곳에서 마이너스 순유출을 기록했다. 절대 수치로는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세 번째, 인구비율로 따지면 압도적인 1위다.

올 들어 매월 인구가 빠져나갔고, 지난 반세기 넘게 계속된 현상이니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파른 그 속도는 전북사회에 둘러쳐진 척박한 삶의 환경을 총체적으로 시사한다.

정부 수립 이후를 총합하면 상황은 처절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1949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2,000만 명을 돌파한 대한민국의 인구는 2018125,182만 명으로 2.5배 넘게 증가했다. 반면 전북의 인구는 같은 기간 205만 명에서 184만 명으로 21만 명이나 감소했다.

인구비중의 추락은 더욱 처참하다. 전국 대비 10.1%를 차지했던 규모가 4%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졸아들었다. 전국 곳곳에 산재하는 전북의 향우사회는 고향에서 빠져나간 자양분인 셈이다.

 

전북도민과 이중 본적

 

미국의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인 수잔 손택 여사의 진단은 향우의 이탈 행렬을 바라보는 전북도민의 심회를 비감에 젖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중 국적을 가지고 태어난다. 건강한 나라와 병의 나라에 동시에 속한 시민으로서 이중 국적이다.’

수잔 손택류의 이분법은 새삼스런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2600년 전 상업과 경제의 발달이 야기하는 계급 구분을 설파했다. ‘보통의 도시는 사실상 두 개로 갈라져 있다. 가난한 자의 도시와 부자의 도시가 그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두 도시 속에 더 작은 구분이 있으므로 그것을 단일국가로 다룬다면 큰 잘못이다고 성찰했다.

손택과 디아스포라를 결부시키면 전북도민은 이중의 본적을 갖고 태어난다는 말로 재해석 된다. 여기에 플라톤을 더하면 전북도민은 한국 속의 또 다른 한국’, 가난하고 병든 사회의 국민에 다름 아니다. 전국의 향우사회는 이를 반영하는 부산물에 다름 아닌 셈이다.

이런 마당에 고향에 남은 도민들이 향우들을 향해 왜 떠났느냐고 묻는다면 절망을 확대재생산 할 뿐이다.

작가 김훈은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이던 1980년대 <내가 읽은 책과 세상>에서 내일이 나아질 것 없는 중년의 삶을 고창군 심원면 삼양사 염전의 소금창고에 투사했다.

무자비한 한 여름의 증발작용이 벌판 가득 깔아놓은 흰 앙금과 제방 위 염전창고의 일렬횡대. 건축물로써의 미학이란 미학은 죄다 벗어던지고 세월과 서해 해풍에 거무튀튀하게 바래지고 사윈 그 무존재의 존재위에 희망을 상실한 전북도민의 비틀어진 삶이 오버랩 된다. 그렇다면 전북의 향우사회는 자아를 찿기 위해 떠나는 생존의 몸부림이다.

 

강제된 선택의 상징어 ‘-1,166’

 

다시 왜 떠났느냐는 투정 섞인 질문에 경제학자와 철학자가 답한다.

‘Life is C between B and D’. 유럽의 근현대 지성사를 주도한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장 폴 샤르트르의 인생 공식이다. C는 선택(Choice), B는 탄생(Birth), D는 죽음(Death)이다. 탄생과 죽음의 무거움을 벗겨내면 한국사회에서 인생은 지역에 남느냐, 서울로 떠나느냐의 선택이다. 샤르트르가 ‘Life is Choice between Local and Seoul’로 환치되는 대목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티부(Tiebout)티부의 가설에서 개인들은 지역 간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자신들의 선호에 맞는 지방정부를 택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른바 발에 의한 투표’(Vote with Foot).

다시 ‘-1,166’을 떠올려 본다. 숫자의 세계를 뛰쳐나와 한편으론 서울공화국대한민국에 대한 현실 고발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자치전북의 무능이 강제하는 발투표를 웅변하는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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