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살이네 집
다살이네 집
  • 전주일보
  • 승인 2019.06.1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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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양연길/수필가
양연길/수필가

내가 가꾸는 텃밭 가운데에 있는 옛집과 인연을 맺고 살아온 지가 어느덧 십팔 년이 되었다. 낡고 헌 집이지만 소용대로 그때마다 손을 보아오니 마치 별장처럼 아늑하다. 텃밭은 나의 놀이터고 건강지킴이다. 텃밭에서 가꾸는 식물들과 노닐다가 지치고 피곤하면 옛집에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

나는 옛집과 텃밭을 아우르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사랑의 집으로 할까 다살이네 둥지로 할까 망설임 끝에 다살이네 집으로 정했다. 다살이네 가족 구성은 다양하다. 크게 나누면 붙박이 식물과 뜨내기 동물이다.

붙박이 식물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지만 사랑받는 작물은 고추, 상추, 배추, 무를 비롯한 채소류, , 수수, 들깨 같은 곡물류, 고구마, 감자, 양파, 같은 구근류 들이다. , 석류, 매실, 대추, 초코베리 등의 유실수가 있는가 하면 화려한 꽃과 몸매를 자랑하는 철쭉, 모란, 수국, 호랑가시나무들도 다살이네 집의 한 가족이다. 그리고 많은 종류의 풀들이 있는데 이들은 왕성한 생명력 때문에 나에게 푸대접받는 녀석들이다. 저마다 뿌리내린 곳에서 열심히 수분을 흡수하고 햇빛을 받아 몸집을 불리느라 열심이다. 내가 가꾸고 키우는 채소와 나무에는 알뜰살뜰 정성을 다하지만, 끊임없이 나를 힘들게 하는 풀들은 뽑거나 베어 땅에 거름으로 보낸다. 제초제를 뿌릴까 하다가도 너무 매몰찬 짓이란 생각에 차마 그러지는 못한다. 그러다가 가끔 뽑히고 베어진 풀들의 아우성을 듣는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기에 이리 대하느냐는 것이다. 대답할 말이 옹색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어찌하랴 제 놈들이 내가 사랑하는 작물들의 성장을 방해하니 밭에서 쫓아낼 수밖에.

채소가 자라는 모습, 열매가 여물어 가는 모습,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커가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그런데 정성을 다하알뜰살뜰 보살펴 주는데도 불구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거나 병충해에 시달리는 걸 볼 때면 안타깝고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 새겨보며 퍽 미안한 마음이 든다.

 

대표적인 뜨내기 동물은 고양이들이다. 고양이가 드나들면서 옛집 천장에서 말 달리기하던 쥐들과 밭을 헤집어 놓던 두더지들이 사라졌다. 가끔 쥐와 두더지시체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럴 때는 고양이들이 퍽 고맙다. 그리고 참새, 비둘기, 까치도 뜨내기 조류지만 다살이네 가족임이 분명하다. 매일 찾아와 아침 인사를 하거나 텃밭에서 먹이를 찾는 걸 보면서 정이 깊어진다. 막 싹을 낸 콩을 먹어치우는 비둘기, 씨앗 뿌려놓은 밭에서 흙 목욕하는 참새, 고양이와 일전을 불사하며 마늘밭을 어지럽히는 까치, 얄미운 짓을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자주 보면서 정이 들어 그렇게 미운 생각이 들진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고양이에게 잡아먹히지 말았으면 하고 염려한다. 그것들 나름대로 먹고 살아가기 위해 텃밭을 뒤지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지난겨울 석류나무 밑에 까치의 깃털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살과 뼈는 흔적도 없었다. 올봄엔 복분자 나무 가지치기를 하다가 까치의 깃털 세 무더기를 발견했다. 역시 뼈 쪼가리 하나 볼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창고에서 참새와 비둘기 깃털도 볼 수 있었다. 누구의 짓일까. 고양이 짓이란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으니 단정을 할 수는 없었다.

고양이에게 까치 네 마리가 희생된 뒤로 한동안 텃밭에서 노니는 까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마늘밭이 짙은 녹색을 띠어 갈 무렵 반가운 까치 소리를 들었다. 집 앞 전신주 변압기 사이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밭에 날아들어 먹이 찾기도 열심이었다. 하루는 숨넘어가듯 우짖는 까치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까치 네 마리가 고양이를 공격하고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감나무 밑에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고 까치는 번갈아 저공 비행하듯 쏜살같이 내려와 고양이를 위협하고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625전쟁의 폭격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자 고양이는 마늘밭으로 숨어들었다. 까치들은 저공비행을 멈추고 고양이 주위로 날아들어 마늘잎을 물어뜯어 젖히며 위협적으로 접근했다가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신기해서 지켜보던 내가 저러다 잡히겠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까치 한 마리가 사라졌다. 죽은 듯이 있던 고양이가 접근하는 까치를 잽싸게 낚아채어 이웃집 담을 넘어가고 있었다.

고양이는 나를 몹시 경계한다. 사료를 주어 배고프지 않게 해주지, 외식하는 날이면 남은 고기나 생선토막 모아다가 주고, 행여 목마를세라 물까지 떠다 바치는데도 가까이 오질 않는다. 어떤 사람이 놓은 독극물 든 고깃점을 먹고 죽어간 고양이가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유언이라도 했나 모를 일이다. 내 마음 몰라주는 고양이가 얄밉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 먹을 것을 챙겨준다. 내가 주는 먹이를 먹고 참새나 까치를 잡아먹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또한 서로 먹고 먹히는 자연의 순리이거니 싶어 어찌하지 못한다.

다살이네 집에 사는 가족들이 더불어 살기를 하면 좋겠다. 나도 그들과 함께 사는 자연의 일원으로서 하고 싶은 말은 먹이 싸움하지 말고 영역침범 하다가 너 죽고 나 죽는 일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긴, 들을 귀 있고 양심이 있다는 사람도 모른 척 못 들은 척하며 자기 이익과 욕망에 따라 허구한 날 일을 저지르는데 너희들에게 말한들 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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