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표모(南川漂母)
남천표모(南川漂母)
  • 전주일보
  • 승인 2019.05.2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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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김 고 운/수필가
김 고 운/수필가

옛 전주 선비들이 전주의 멋진 풍광을 네 글자로 이름 지어 칭송했던 전주팔경이 있다.

전주천이 한벽루 아래 바위벽에 부딪히며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말하는 한벽청연(寒碧晴煙), 기린봉 봉우리를 살짝 비켜 토하듯 떠오르는 달이 멋져서 기린토월(麒麟吐月), 옛 남고사에서 해 저무는 시간에 범종을 쳤는데,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노을빛이 물드는 광경을 가리킨 남고모종(南固暮鍾), 다가산 천양정에서 한량들이 활을 쏘면 기생들은 지화자를 부르던 풍류를 말하는 다가사후(多佳射帿), 삼례 만경강가 비비정(飛飛亭) 앞 강에 기러기들이 날아내리는 정경을 뜻하는 비비낙안(飛飛落雁), 덕진연못에 연꽃이 피어 향기가 그윽한 시기에 연잎이나 연밥을 따는 정취를 그린 덕진채련(德津採蓮), 옛날 삼례 만경강이 포구였던 시절에 석양 무렵이면 하루 일을 마친 배들이 돛을 높이 올리고 돌아오던 광경을 뜻하는 동포귀범(東浦歸帆), 그리고 전주 인근에 유일한 폭포인 위봉폭포(威鳳瀑布)까지를 전주 8경으로 쳤다.

그런데 어떤 문헌에는 위봉폭포를 빼고 전주천에서 아낙네들이 냇물에 발을 담그고 빨래하는 광경을 말하는 남천표모(南川漂母)8경으로 쳤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남천표모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위봉폭포가 들어앉아 전주 8경 노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생각으로는 전주 팔경에 위봉폭포보다 당시의 상황대로라면 남천표모가 제격이 아닐까 한다.

전주천은 내 소년기를 건강하게 보낼 수 있게 만든 체력단련장이었고 자연의 신비를 배우게 한 교육장이었다. 물이 무서움을 알게 했고 그러나 물에 순응하고 물에 몸을 맡기면 적은 힘으로도 물에서 얼마든지 놀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봄에 우리 집이 전주 남노송동에서 교동으로 이사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남천교가 있었고 거기서 조금 동쪽으로 가면 한벽당 물놀이터가 있었다. 나는 그해 여름내내 한벽당 물놀이터에서 헤엄치기를 배우느라 배가 부르도록 물을 먹고 토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물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방법을 터득했다. 물은 두려워하거나 거스르지 않고 몸에 힘을 빼면 자연스럽게 내 몸을 가볍게 띄워주는 좋은 친구였다.

한벽당 물놀이터 밑으로 물이 얕아지는 천변에 납작하고 평편한 제법 큰 빨랫돌이 물가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여러 개 놓여있었다. 여인들이 빨래하기 편하도록 그 빨랫돌 앞은 조금 깊게 물고랑을 만들어놓았다. 어린 내가 미처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여인들의 빨래터 풍경은 1갑자 세월이 흐른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침밥을 먹고 가족들이 학교와 일터로 나간 다음이면 아낙네들이 빨랫거리를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냇가 빨래터에 모여들었다. 그 시절의 옷감은 대부분 면직물이었고 자주 세탁하지 않고 때가 절어있어서 쉽게 빨아지지 않았다. 더구나 세탁비누라는 게 미강유와 쌀겨를 섞어 만든 시커먼 떡 비누여서 빨래를 박박 문지르고 방망이로 여러 번 두들겨야 겨우 때가 빠졌다.

1954~5년 무렵, 한국전쟁이 가까스로 휴전협정으로 중단된 그 시절의 서민들은 먹고사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일부 체면을 차리는 계층을 제외하고는 몸을 꾸미거나 감추는 일에 둔감했다.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네의 젖가슴이 치맛말기에서 빠져나와 흔들리는 광경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빨래터라는 곳은 여인들의 해방공간이었다. 거기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밤 공간의 이야기가 어렵지 않게 튀어나왔고 여자들만의 비밀이 공공연한 자랑이 되기도 했다. 밤새 남편한테 시달려 기운이 빠졌다고 은근히 남편 자랑을 해도 좋았고, 미운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두들겨 패는 마음으로 빨랫방망이를 휘둘러 빨래를 두들기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냇가에서 덜퍽진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치마를 걷어 올리고 발을 물에 담근 채 빨랫방망이를 두드리면 어느새 젖가슴이 빠져나와 흔들거려도 누구 하나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처녀가 아닌 애 딸린 여자들이 젖가슴을 드러내는 일은 크게 흉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렇게 여러 아낙네가 나란히 앉아 빨래를 두드리면 드러낸 젖가슴과 함께 장관을 이루었다.

아프리카 여인들이 아무렇게나 가슴을 드러내듯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여러 아낙네가 어울려 가슴을 노출하고 빨래하는 광경은 한량들의 눈에는 절경으로 보였을 듯하다. 그런 빨래터의 광경을 전주 팔경으로 꼽은 선비라는 부류와 한량들의 생각을 지금 시각으로 풀어보면 퍽 음흉하고 남사스럽다. 그들은 아마도 허연 허벅지와 덜렁거리는 젖가슴을 멀리서라도 구경하기 위해 일삼아 한벽루를 오르내리며 천변에서 서성거렸을 것이다.

풍속화를 많이 그렸던 단원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빨래터에서 상체를 드러낸 여인들이 머리를 감고 빨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의 한쪽에서는 떠꺼머리총각 둘이 몰래 숨어서 훔쳐보고 또 한 편에는 담뱃대를 든 갓 쓴 양반이 넌지시 빨래터를 넘겨다보고 있다. 그렇게 그 시절에는 빨래터라는 여자들의 공간에 남자들의 관심이 쏠렸던 것 같다.

그 에로틱한 그림이 보여주듯 남천표모(南川漂母)’라는 이름을 붙여 아낙네들의 빨래터 풍광을 전주 8경으로 꼽은 일은 남성 위주의 사회제도 아래 겉으로는 한없이 점잖은 척하며 살아야 했던 남성사회의 이중성을 잘 드러낸 일이 아닌가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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