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청춘이여
응답하라 청춘이여
  • 전주일보
  • 승인 2019.05.1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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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김 영 숙/수필가
김 영 숙/수필가

응답하라 격하게 청춘을 살았던 우리네 한비인이여!” 여고 동창생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한비인이란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B반 동창생을 의미하는 우리만의 약칭인데 tvN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라는 제목을 응용하여 동창회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추억을 공유해서 그런지 문자를 받는 순간 가슴 한쪽에서 잠자고 있던 추억들이 새싹처럼 새록새록 돋기 시작했다. 아스라한 그 시절의 추억들이 스멀스멀 치밀어 오르는 그리움과 함께 돋아났다.

나는 강원도 정선 산골에서 오 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와 더불어 축산업을 하셨다. 그러다 1980년대 초 한우 값 폭락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내가 한일합섬이라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는 1차로 신체검사, 2차 실기시험을 치러 입학생을 선발했다. 경쟁률이 꽤 높았다.

우리 경제가 수출을 통하여 막 성장하기 시작하던 가난한 시절에 돈을 벌며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건 기회였기 때문에 많은 지원자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도 여러 명이 응시했지만, 나만 합격하는 행운을 얻었다. 학생들은 전국에서 모여든 소녀들이었고 3교대로 근무했다. 학교에서도 A, B조로 나눠서 공부했는데 한 학년이 60명 정원에 무려 8반까지 있었다.

기숙사는 밤 열 시면 소등했고 유일하게 불을 켤 수 있는 곳이 복도였다. 우리는 차디찬 복도에 나와 앉아 공부했고 고된 회사 일로 수업시간에는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래도 3년간 공부하면서 차곡차곡 저축해서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도 있었고 전문 직업학교에 진학한 친구도 있었으며 동생들 학비를 보태기 위해, 부모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졸업 후에도 회사에 남은 친구도 여럿 있었다.

그런 어려움을 견딘 친구들이 이제는 그 시절 추억을 그리워하며 서로 안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 행방을 찾고 확인하여 하나둘 안부를 주고받는 수가 늘어가면서 날짜를 정하여 한꺼번에 만나는 날을 만들었다. 그렇게 전국 각지에서 열심히 사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은 첫사랑을 만나는 일처럼 설레는 일이 되었다.

가난했지만 순수하고 어렸던 시절, 돌아보면 행복했던 그 시간을 서로의 가슴에서 찾아내서 비추어보고 어루만지며 추억하면 세상만사 온갖 시름이 저만치 물러갔다. 세월 속에 변한 친구의 얼굴에서 옛 모습을 찾아내며 반가워했다. 달라진 말투와 목소리에서 지난 흔적을 발견하고 추억도 한 움큼씩 차곡차곡 소환할 수 있어 좋다. 가끔은 지치고 힘들 때 동창들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고 재충전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네 청춘은 응답하고 있다.

어떠한 試鍊困窮도 이를 克服 할 수 있는 少女 以外에는 이 校門을 들어설 수 없다.”라는 이 문구는 모교의 교문에 들어서면 처음 마주하던 교시(校是)이다. 우리는 그렇게 시련과 곤궁을 극복하며 십 대를 보냈다. 가장 빛나야 할 시절을 가장 힘들게 보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어둡던 시절을 서로의 꿈에 기대며 견뎌왔기 때문이다. 꿈만 잃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청춘이라는 이름을 지닌 아름답고 가슴 뛰는 시절이었으므로 드문드문 행복한 시간도 있었다. 그 시절이 마냥 고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응답하라라는 드라마처럼 우리 또한, 일하던 사회인이기 이전에 그 시대를 누릴 줄 알았던 청춘이었다. 여고 시절엔 교복 자율화 시행으로 각자 개성에 맞는 사복을 입을 수 있었고 강변 가요제 대상 곡인 이선희의‘J에게를 저마다 좋아하는 대상 이니셜로 바꿔 부르며 마냥 행복했었다. 그때 내가 좋아했던 사람도 마침 ‘J’라는 이니셜로 시작되었던지라 눈치 보지 않고 원 없이 ‘J에게를 불렀다.

지금도 내 앨범 속에서는 이선희의 짧은 머리와 잠자리 뿔테안경을 쓴 내가 활짝 웃고 있다. 그 뒤에 윤수일의 아파트라는 노래가 가요톱10’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무려 서른 번 정도 1위를 했었고 우리는 거기에 열광했다. 비록 남들보다는 조금 바쁘고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나름대로 시대적 흐름에 따르기도 하면서 젊음을 즐기며 잘 버텨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나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다녔다. 삼만 원짜리 자취방에서 고단하게 살던 청춘이었다. 비록 앞집, 옆집, 뒷집, 너나없이 단칸방에 사는 고단한 삶이었을지언정 도란도란 행복한 가정의 화목함을 느끼며 살던 이웃이 있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를 위해 따뜻한 아랫목 이불속에 밥공기를 넣어두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있었고, 김치전 하나도 나눠 먹던 한 지붕 이웃이 있었다. 나중에 꼭 한번 찾아뵙겠노라고 약속하고 떠나왔던 수원시 조원동 내가 살던 골목 풍경은 이제 흔적도 없지만, 고스란히 추억으로 남았다.

청춘, 누구는 겪어야 하고 또 누구는 지나온 시간이다.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단지 지금보다 더 젊은 나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 시절에는 이웃이 남남이 아니었고 가난한 가운데서 서로를 보듬고 염려할 줄 알았기에 고개를 돌리는 이곳저곳에서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온기와 사랑이 숨 쉬던 그곳, 다시는 그 시절이 올 수 없는 아쉬움, 다시는 한곳에 모아 볼 수 없는 풍경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응답하라 나의 청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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