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떠나는 이를 배웅하며
행복하게 떠나는 이를 배웅하며
  • 전주일보
  • 승인 2019.04.1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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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 운/ 수필가
김 고 운/ 수필가

화사하게 피어 잠시 어둡던 세상을 환하게 밝혔던 벚꽃잎이 우수수 바람에 날려 이리 쓸리고 저리 몰리며 마지막 몸부림이 한창이다. 오자 떠나는 봄이 벚꽃의 몸을 빌려 화사하게 빛을 발하고 떠나는 정경은 찰나를 살더라도, 세상을 밝히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듯하다. 봄은 이렇게 겨울을 밀어내고 피면서 바로 지는 봄꽃의 모양을 빌려 우리에게 덧없는 삶을 의미를 깨우쳐 주고 가기에 더욱 애달프다.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라던 T.S. 엘리엇의 말처럼 기억과 욕망이 뒤섞이는’ 4월이다. 죽음에서 소생하여 다시 꽃피는 계절이지만,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고, 사랑하는 것들과 아까운 이들이 곁을 떠나는 아픈 계절이다.

아련한 봄날의 아쉬움 속에서 슬픈 소식이 들렸다. 내 젊은 시절에 처음 만난 이후 지금껏 이타행(利他行)으로 평생을 살아온 분,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세상을 위하여 한 몸 불사르는 걸 두려워하지 않은 지정환 신부님이 선종했다. 임실치즈를 만들고 농민들이 살길을 열어주신 신부님은 치즈 만드는 기술이 제대로 전수되자 공장을 통째로 조합원들에게 넘겨주고 무지개 가족을 맡아 공장을 떠났다. 군부 독재 시절에는 절망하는 국민을 대신하여 홀로 광화문 광장에서 시위하다 연행되고 강제 출국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부님은 20162월 마침내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인으로 살다가 이 땅에 묻혔다.

다발성 신경질환으로 지팡이를 짚다가 목발을 짚고, 휠체어를 밀고 다니며 장애인들을 돌보아 온 그 희생과 열정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거룩한 것이었다. 가족조차 외면하는 장애 환자를 데려다가 손수 씻기고 먹이고 치료해서 밝게 살아갈 수 있게 했다. 소양의 무지개 가족에는 그런 안타까운 이들이 여럿 있었다.

신부님은 오직 남을 위해, 어려운 이들을 위해 자신을 다 내주다가 벚꽃이 비처럼 하염없이 날리던 413일 오후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스물여덟 불같은 청춘의 욕망 따위는 다 내던지고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가난을 깨우기 위해 찾아왔던 그분이 떠났다.

신부님은 가난을 이기고 농촌에도 자가용이 시글시글한 나라가 되어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정신은 처음 올 때부터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곳곳에 숨은 중증 장애인들을 찾아 돕느라 자신의 몸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그분이 떠났다. 건강을 잃어 고통받으면서도 장애인들이 배설하는 오물을 손수 닦아주던 그 끝없는 희생을 당신의 하느님이 맞아들여 등을 토닥여주고 위로해 주면 좋으련만.

내가 지정환 신부를 만난 건 군사독재가 치성하던 1970년께였다. 임실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때,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신자가 되면서 처음 뵈었고, 가끔 성가리 치즈 공장에 가서 만들어진 치즈와 햄, 바테 등을 시식해보기도 했다. 내가 공직에 염증을 낼 때, 함께 해보자는 권유도 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몸으로 하는 일을 견딜 수 없을 듯하여 합류하지 않았다.

임실치즈가 제대로 만들어져 당시 조선호텔에 납품을 시작한 것은 1971년쯤으로 기억한다. 그때 신부님과 함께 조선호텔에 가서 난생처음으로 피자라는 이탈리아 음식을 맛보았다. 임실치즈로 만든 피자의 맛은 내게 생소했지만, 입에 감기는 서양 음식으로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다.

416일 오전, 중앙성당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떠나는 신부님을 배웅한 노래는 당신의 유지에 따라 노사연의 만남이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라는 가사처럼 신부님은 처음부터 한국을 사랑하기로 작정을 했다. 서품을 받자마자 런던에 가서 한국말을 배웠다.

<만남>의 노랫말대로 당신이 와서 돕고 봉사하다 가는 일은 우연이 아니라 오래전에 마련된 일이었다고, 당신은 하느님의 도구로 쓰였을 뿐이라고 유언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믿었으므로 한국에서 60년 동안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며 버틸 수 있었고, 그 믿음대로 살았기에 자신보다는 불행한 이들을 더 생각하고 돌보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의 힘으로 지탱할 수 있어서 행복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처음에는 신부님의 선종 소식에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진즉 한 번 뵈어야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덜컥 부음을 듣자 안타까워 눈물이 솟았다. 찾아가고 싶었지만, 이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어서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친 일이 후회되어서다. 당신과 인연이 된 그 신앙을 버렸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였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 덩어리가 이타행으로 평생을 이어온 당신을 만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번은 꼭 뵈었어야 했는데.

영결식에서 애통해하는 많은 이들의 슬픔이 당신의 진심과 맞닿아 있음도 보았다. 당신은 몸의 고통을 뛰어넘어 마음은 언제나 행복한 분이었다. 봄꽃처럼 짧은 생을 환하게 비추고 떠난 분이다. 누구보다 즐겁게, 힘들다는 내색 없이 어려운 일과 희생을 감당하신 신부님, 이제 치명자산에서 당신의 고향인 임실을 바라보며 영원한 안식을 얻으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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