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세상에 스승을 잃다
어지러운 세상에 스승을 잃다
  • 신영배
  • 승인 2019.04.1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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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 배 /발행인
신 영 배 /발행인

포근한 날씨에 지겹던 미세먼지도 사라져서 파란 하늘이 보이니 조금은 살맛이 난다. 오랜만에 반려견 ‘산’이를 데리고 즐겁게 산책을 했다. 집에 돌아와 라디오로 아침 뉴스를 듣다가 잠시 좋았던 기분이 마치 구정물 통에 빠진 듯 불쾌해졌다.

뉴스는 5.18. 망언으로 국민의 공분을 샀던 정당의 중진이라는 모 국회의원이 세월호 유족들을 모독하는 말을 SNS에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되자 슬그머니 지워버리고는 정치판을 향한 말이었다고 변명을 해, 또 한 번 여론의 화살을 받고 있다는 보도였다.

지난 15일 같은 당 소속의 차명진 전 의원이 세월호 유가족을 향해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처먹고, 찜 쪄 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진짜 징하게 해 처먹는다.”고 비난한 데 이어 16일에는 정진석 의원이 “세월호 그만 우려먹으라 하세요. 죽은 애들이 불쌍하면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죠. 이제 징글징글해요”라고 동조하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정진석 의원은 하필이면 그날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가 주관하는 ‘국회를 빛낸 바른 정치 언어상’ 시상식에서 ‘품격 언어상’을 받았다고 하니, 아이러니 수준을 넘어 해괴한 일이 아닌가 싶다. 평소에도 별로 품격 있는 표현 보다는 과격한 언사가 많았던 인물에게 ‘품격 언어상’을  주었는지 매우 궁금하다. 하지만 국회나 정치나 온 세상이 제멋대로 돌아가는 판이니 어쩌랴.

요즘의 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역겹다. 맨 정신으로 지켜보기 어려울 정도다. 여야가 선거법 개정을 합의했다던 게 언제인데, 선거구 획정의 법정 시한인 이달 15일을 넘겨도 별 말이 없다. 한국당과 민주당은 그대로 두는 게 좋고, 미래당과 평화당은 지지율이 바닥이어서 법을 고쳐봐야 남 좋은 일이 될 듯 하니 말만 비치다가 슬그머니 물러 앉은 형국이다. 애가 타는 건 정의당뿐인 것 같다.

아무리 파락호 정치라고 해도 기본은 있어야 하는데, 서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여론이 나빠진다 싶으면 잠시 협상을 하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발을 풀어버린다. 입만 열면 거짓말과 사탕발림이다. 신의도 도의도 모두 헌신짝처럼 버린 정치판이다. 오직 일신의 안위와 돈벌이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그들이다. 거짓말과 가짜뉴스와 막말과 물어뜯기에만 능숙한 그들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맡기고 있으니 한숨뿐이다.

이런 답답한 정치 현실에서 우리는 지난 13일 소중한 분을 잃었다.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해 조건 없이 몸 바쳐 어려운 이들을 돌보아 온, 전북의 은인 지정환 신부님이 선종했다. 신부님은 중학교 때에 어려운 나라에서 선교할 결심을 하고 삼회라는 선교단체에 가입했다고 한다. 삼회 회원은 유럽의 다른 선교단체와 달리 그 나라 교구의 지시대로 일하도록 정하고 있는 단체다.

그래서 신부님은 한국에 들어올 때 한글을 미리 배웠다. 부안성당에 이어 임실성당의 본당 신부를 지냈고 대부분의 시간은 치즈개발과 함께 치즈공장 운영에만 몰두했다. 치즈공장이 제자리를 잡아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했을 때, 신부님은 조합원들에게 모든 것을 다 내주고 홀몸으로 ‘무지개 가족’이라는 전주교구 장애인 돌봄 기구를 맡았다.

가족조차 돌보기 어려워 모두가 배척하는 장애인들을 데려와서 당신이 직접 씻기고 병을 치료하며 돌보았다. 당신 자신도 ‘다발성 신경증’에 시달려 지팡이를 짚다가 목발을 집고, 다시 휠체어를 타는 몸인데도, 그런 몸으로 장애인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기도 하면서 돌보아 온 신부님이야말로 살아 있는 성인(聖人)이었다.

벨기에의 유력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어쩌다가 한국에 올 생각을 했는지, 지독하게 가난한 산촌 임실에서 치즈라는 서양의 음식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는지, 장애인들을 돌보게 되었는지를 두고 당신은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했다. 자신의 행동은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고, 모든 것은 계획된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느님께 모든 공을 돌리고 세상을 떠났다.

신부님의 한국사랑은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더욱 단단해졌다. 독재에 항거하다가 잡혀가는 민주인사들을 보며 당신도 독재정권 타도에 동참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일인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강제 출국을 당하기도 했다. 신병치료차 본국에 갔다가 국내에 들어오려면 독재정권이 입국을 막기도 했다. 신부님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운 진정한 민주투사였다. 신부님은 그렇게 한국을 사랑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위해 10,000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프랑스 선교회 문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8세에 한국에 들어와서 88세에 선종하기까지 60년 동안 오로지 한국을 위해 일하고, 싸우고, 연구하고, 봉사하고, 문서를 번역해서 교회사 정리를 도운 그런 애국자가 이 땅에 또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신부님은 마침내 한국의 국적을 얻었다. 그리고 끝내 한국인으로 돌아가셨고, 한국 천주교의 성지 '치명자산'에 묻혔다. 솔직히 지정환 신부님의 올곧은 삶을 생각하며 오늘의 더럽고 치사한 정치판을 걱정하는 것조차 송구스럽다.

하지만, 오늘의 정치인을 비롯한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신부님의 1/10, 아니 1/100 만큼이라도 닮도록 노력을 한다면 이 나라가 이런 모양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신부님은 분명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어 영복을 누리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벌써부터 신부님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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