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환 신부님의 영복(永福)을 빕니다
지정환 신부님의 영복(永福)을 빕니다
  • 김규원
  • 승인 2019.04.15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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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후 지정환(Didier t’Serstevens) 신부가 선종, 오늘 10시 중앙성당에서 영결미사를 통해 작별한다. 본지가 지 신부의 선종에 사설을 통해 애도의 뜻을 표하는 의미는 그분의 일생을 통하여 우리 전라북도가 입은 경제적 도움이 컸다는 데에만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는 우리를 깨우친 스승이었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통째로 내놓은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도 15일 지정환 신부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는 1931125일 벨기에 브뤼셀의 대단한 기사(騎士)가문에서 태어났다. 루벤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예수회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를 마치고 루벤대학에서 1958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을 받고 바로 런던대학에서 1년 동안 한국어 공부를 끝내고 195912월 한국에 왔다. 전주교구 전동성당 부제로 사제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찟어지게 가난한 한국농촌을 일깨울 결심으로 1961년 부안성당에 부임하여 카톨릭 구제회의 도움을 받아 간척사업을 시행하여 만들어진 농토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지만, 농민들은 그 땅에 씨앗을 심지 않고 고리대금 업자에게 모두 헐값에 팔아넘겼다. 농사를 지을 비용도 기다릴 시간도 없을 만큼 가난했기 때문이다.

부안에서 실망한 그는 임실에 와서 더 가난하고 희망 없는 산골에 다시 희망을 심는 노력을 시작한다. 치즈 제조 실험에 성공하자 본국에서 돈을 가져다가 치즈 공장을 세워 가동을 시작했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 조합원들의 원성에 시달리기도 했다.

수 없는 실패를 거친 끝에 제대로 치즈를 만들어 서울 반도호텔에 납품을 하게 되었을 때, 당신의 것은 하나도 없고 치즈 공장은 통째로 조합원들의 것이었다. 지금 그 치즈 공장이 발전하여 최고의 치즈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실속을 차린 배신도 있었고 사익을 취하는 행위도 있었지만 눈감아 주며 모두 용서했다.

지정환 신부는 이 나라의 누구보다 대한민국을 사랑했으며 전라북도를 사랑했다. 1970년에 서구인에게 흔한 다발성 신경 경화증에 걸려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몸으로 치즈를 만드는 연구를 계속했고, 신용협동조합운동으로 가난한 산촌을 일깨웠다.

군사독재에 맞서 일인시위를 거듭했고 강제 출국을 당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신병으로 사목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가난한 전북을 일깨우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는 얼굴만 서양사람이었지, 마음은 영락없는 전라도 촌놈이었고 우리의 형님, 삼촌, 같은 이웃이었다. 몸이 완전히 망가져 운신이 어려운 상태에서도 가톨릭 보호시설인 무지개 가족을 돌보고 운영하며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이 나라의 누구도 그이만큼 전북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전북의 은인이며 가난한 이들, 어려운 이들, 고통받는 이를 위해 일한 분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며 수범이 되어준 신부님의 영전에 도민의 마음을 모아 고마운 정을 드리고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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