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아 道'
'파리아 道'
  • 전주일보
  • 승인 2019.04.1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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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논설위원
이현재 논설위원

“내가 이 재능을 가지고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은 악마의 저주다.” 러시아의 저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이 죽기 몇 달 전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 남긴 말이다. 시대와 환경을 비관한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37세로 요절한 천재시인의 비애는 19세기 초의 러시아와 푸슈킨 개인적인 삶으로만 수렴될 뿐인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호남 출신의 삶으로 관통되고 있는 모습을 도처에서 보게 된다.

-호남 출신 지성들의 비애-

“나는 ‘파리아 도(pariah province)’ 출신.” 한국의 지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가 미국 사회과학연구원 일로 미국인 교수들과 회의를 하던 막간에 한국정치와 지역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미국인 교수가 불쑥 “선생의 고향은 어디냐”고 물었다. 전남 함평 출신인 김 교수의 가슴 때리는 대답은 ‘파리아 도(道)’.

파리아가 인도 계급사회에서 최하위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집단을 일컫고, 오늘날 영어 사전에서 천민이나 부랑아,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착근된 단어니 스스로 ‘따돌림을 당하는 천민의 땅 출신’이라고 인식한 한국 지성의 비애를 보게 된다.

호남의 속울음은 김우창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비평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전남 진도 출신의 고 김현 서울대 교수도 생전에 자신의 고향 전라도를 ‘원죄’라고 토로했다.

호남은 학문과 사상의 지성에게만 천형의 땅이 아니다. 현실에 발을 딛어야만 생존하는 정치인에게는 정치 인생과 비상을 옥죄는 사슬이요, 족쇄로 작용한다.

국민의 정부가 후반기에 접어들자 고 강원용 목사가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당시 서울시장에 재임 중이던 고건 전 총리를 차기인 14대 대선 후보로 천거했다.

이 때 DJ의 반응은 단 한 마디. “고 시장은 호남 출신이 아닙니까?” 그리고 DJ의 선택은 영남표 분할 전략의 노무현이었다. 알다시피 고건은 서울 태생이다. 다만 전북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선친 고형곤 박사의 고향이 전북 옥구일 따름이다.

당대는 물론이요, 선대의 출생지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어 호남과 실오라기 연고만 발견돼도 주홍글씨의 낙인을 찍는 이 땅의 지역주의 매카시즘. 또 그 위에 겹쳐 호남이 호남을 배척하는 자기혐오. 고건 전 총리의 좌절은 15대 대선 국면에서도 계속된다.

훗날 그가 모 중앙일간지에 연재한 글에서 밝혔듯이 지역적으로 지리(地理)도 얻지 못하고(노무현 정부 실패의) 천시(天時)도 불여의 해 불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혔으니, 그 심경의 울림이 자아내는 먹먹함은 김우창의 ‘파리아 道’ 못지않다.

-한국의 자화상 ‘지역=권력’-

‘천시는 지세의 이로움만 못하고, 지세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天時不如地理 地理不如人和)’. 맹자의 말씀이다.

하지만 성현의 말씀도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호남인에게는 건조된 사문(死文)일 뿐이다. 학문과 인품을 아무리 갈고 닦아도 “너 호남, 거기까지!”라는 지리적 울타리에 갇히기 십상이다.

학계와 정계뿐인가. 민간과 공직사회에서의 호남배제는 강고한 현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DJ와 문재인 정부에서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건국 이래 역대 정권의 장차관급 고위공직 총계를 보면 호남 출신은 인구 비중의 절반 안팎에 불과하니 승진과 등용은 좀처럼 뚫기 어려운 좁은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권력기관의 고위직으로 가는 문은 아예 닫혀 있다시피 했으니 ‘지역이 곧 권력’인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게 된다.

자본주의의 총아인 기업 부문은 더욱 심하다. 회사원의 꽃 또는 별이라고 일컫는 대기업 임원 승진에 있어 호남 출신의 비율은 터무니없이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재벌기업의 호남 출신 임원은 출생 당시 인구 비중의 1/3을 넘지 못한다.

특히 나머지 재벌을 다 합한 것보다 막강한 지배력을 과시하는 삼성의 그것은 다시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공직은 물론 민간사회까지 온통 비리와 부패, 비효율이 판을 치고 국가경쟁력은 해마다 뒤로 밀려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지역매카시즘의 집단 도덕불감증에 감염된 국민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쟁투, 정글사회로 부메랑 되어 스스로의 목을 겨누고 있다. 이렇다 보니 한국의 이혼율과 자살률은 세계 최고로 치솟고 출산율과 행복지수는 최하위권으로 추락해 있다. 국가공동체의 붕괴, 한국호의 침몰 현상이다.

-고대 그리스 멸망의 교훈-

분열하는 한국은 고대 그리스의 멸망을 상기시킨다. 지금까지 나타난 최선의 정치제도로 평가되는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그 힘으로 3차에 걸친 제국 페르시아의 침공을 저지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 연합이었다.

하지만 외침에서 벗어나자 고대 그리스는 아테네의 델로스동맹과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동맹으로 분열돼 자기소모적이고 참혹한 27년 내부 전쟁을 벌이며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지만 동족상잔의 자해 행위에 국력을 모두 소진한 두 도시국가는 마케도니아에 맥없이 패권을 내준 데 이어 로마에 복속돼 1000년 암흑기를 보냈다.

2500년 전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내부전쟁, 오늘날 대한민국의 지역주의, 그 지역주의에 기대어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매일같이 되풀이 되는 정쟁, 시공을 뛰어넘어 닮은꼴로 빚어내는 부조화의 불협화음이다./이현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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