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그 깊은 함의를 보다.
생명, 그 깊은 함의를 보다.
  • 김규원
  • 승인 2019.03.21 15: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수필
백 금 종 / 수필가
백 금 종 / 수필가

한 생명체의 탄생은 자연 선택일까, 행운일까.

한 수필가의 글을 보다가 사람이 태어나고 사는 일이 자연 경쟁의 소산인지, 기가 막힌 행운을 차지한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오래된 수필집 <빈 산에 노랑꽃(저자, 장돈식)>생명, 그 장엄한 승리라는 제목의 글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자기가 최고의 승리자가 된 순간을 상상하며 기뻐했다.

아버지의 허리 근처 정낭에서 안주하고 있던 나와 나의 동기들은 현기증 나는 충동에 휩싸이며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일시에 쏟아져 들어갔다. 어머니의 자궁, 궁이래야 빛이라고는 없는 암흑의 궁전이었다. 그래도 유영에 필요한 액체가 그득했다. 그 속에서 동기들은 사력을 다해 한 표적으로 마구 돌진했다. 타깃은 어머니가 준비한 난자, 오직 그것은 하나뿐이었다. 누구든지 먼저 난자를 점령해야 했다. 동그랗고 예쁜 그 히로인을. 치열한 경주를 하며 정신없이 치고 나가다 보니 그 많던, 수억의 나의 동기들을 제친 후 빠끔한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생에 최고의 승리였다.”

작가는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수억의 정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난자에 먼저 도달하여 얻어낸 승리의 결과라고 상상했다. 과연 그러한가,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얻어낸 승리가 아니고 숱한 행운이 겹치고 겹치는 최고의 행운으로 얻은 결과가 아닌가 한다. 수억 개의 정자들을 제치고 자궁 속의 독한 산성 액체를 이겨내며 헤엄쳐 마침내 난자에 도달하였더라도 마침 건강한 난자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 부드러운 표면 안에 들어가 최후의 관문을 무사히 열 수 있었고 다른 정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난자가 막아주어 난자핵과 결합이 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신비한 행운을 어느 절대자가 안배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약한 인간의 본성을 흔들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명이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자연 선택은 언제나 가장 강한 유전자를 지닌 것,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DNA가 최종선택 된다. 강하고 잘 적응하지 못할 유전자는 자연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정자가 난자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 수정이 되었다고 해도 수정란이 제대로 자궁내막까지 도달해 착상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야 하고, 자궁내막도 충분히 두터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수정란이 자궁내막에 착상한 후 임신이 계속 이어지려면 자궁 안에 적당한 영양이 공급되면서 따뜻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이 절묘하게 딱 들어맞아야 비로소 하나의 생명이 성장을 시작한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최선을 다하지만, 운이 없으면 잘 될 일도 틀어지고 운이 좋으면 저절로 일이 풀려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기도 한다. 그러기에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저급한 노름판 용어가 고개를 끄덕이게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선택과 행운이 겹치는 절묘한 과정을 거쳐 백씨 가문의 장자로 조부모님의 절대 보호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우리 조부님은 당신들이 외아들을 둔 것은 몹시도 애석해하셨다. 그 시절은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다. 부귀다남(富貴多男)은 모든 이가 바라는 최고의 소망이었다.

내 아버지 한 분만 둔 조부모님은 손자를 많이 두는 것이 소원이었던 모양이다. 그토록 아들을 염원하는 가정에서 보란 듯이 손자인 내가 고고성을 지른 것이다. 그것도 만월이 은실을 실실 풀어내는 섣달 보름께였다. 하얗게 눈 덮인 대지 위로 섣달 보름 달빛이 시리게 부서지는 가운데 이 세상과 대면한 그 아이가 바로 나다.

나의 행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굴참나무를 타고 오르는 능소화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질긴 삶의 밧줄을 움켜잡을 수 있었던 것도, 창궐하는 전염병 속에서 다 죽었다고 거적을 씌우려는 순간, 울음을 터트리고 황천길에서 되돌아 나온 것도 기막힌 행운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자의 보살핌이 있었다고 믿을 만큼 숱한 행운이 항상 같이했기에 80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올 수 있었다.

우리 세대는 지독히 가난하고 못사는 시대에 그나마 행운을 얻어 세상에 나온 사람들이지만, 너나없이 버겁고 험난한 세상을 살았다. 다행스럽게도 나라 경제가 풀리는 바람에 지금은 대부분 안락한 환경에서 살면서 자동차도 굴리고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산다. 이런 일도 생각해 보면 커다란 행운을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그저 찾아오는 행운을 맞이한 건 아니다. 우리 모두 죽어라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저축해가며 저마다 살림을 일구었다. 허리띠를 조이고 남보다 한 시간 더 일하는 치열한 삶을 살아서 오늘을 이루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연 선택과 절묘한 행운으로 세상에 나와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지독한 노력을 기울였고, 거기에 어려울 때마다 행운이 같이하여 지금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이 세상에 남아있지 못했을 터이고 오늘 이렇게 그 모든 절묘함에 고마워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나이 들어서 몸이 전만 같지 못하더라도 아직 세상에 남아 거대한 변화의 회오리를 체험할 수 있는 일에 감동하며 고마워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