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빛, 소리, 그리고 삶
새벽, 빛, 소리, 그리고 삶
  • 김규원
  • 승인 2019.03.0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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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운 / 수필가
     김고운 / 수필가

  커튼을 걷고 베란다 큰 유리창을 열었다. 짜르르하도록 차가운 새벽이 정수리를 지나 이마에 꽂혀 든다. 내려다보이는 길과 자동차, 가로등 불빛이 좋은 렌즈로 촬영한 사진 마냥 선명하게 다가선다. 방충망을 열고 창틀에 올라서서 한껏 몸을 새벽 안으로 밀어 넣어본다. 청량한 새벽의 기운이 그 신선함으로 날 받아들여 밤새 늘어진 볼을 팽팽하게 잡아 씻어준다.

  온몸에 새벽 기운이 가득할 즈음에 창틀에서 내려왔다. 방문을 활짝 열어 새벽을 방안에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간밤에 내 가슴이 뱉어낸 날숨에 탁해졌던 방안공기가 밀려 들어오는 새벽에 자리를 내주고 빠져나가느라 부산하다. 방구석에 아직 나가지 못한 묵은 기운을 신문지를 펴서 부채질해가며 몰아내고 새벽을 가득 채웠다. 비로소 밤새 내 허파 속을 드나들며 끌어낸 잡내와 퀴퀴한 냄새가 모두 빠져나가서 숨쉬기가 한결 수월하다.

  베란다 창을 닫고 청량함을 즐기다가, 갑자기 아예 밖으로 나가 몸으로 새벽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춥다는 구실로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다가 다시 덧잠에 빠지지 않겠다는 뜻이다. 얼른 바지를 입고 머플러로 목을 감싼 뒤에 두툼한 점퍼까지 입었다. 기온은 영하 5.6, 대기는 보통이다. 얼룩빼기 비니를 쓰고 장갑까지 챙겨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 마당에는 벌써 여기저기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득인다. 벌써 새벽을 깨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새벽에 먼 길을 떠나려 하고 또 다른 이는 새벽에 교대하는 공장에 출근을 서두르는 중일 것이다. 또 다른 이는 애인 집에 와서 밤새 사랑을 나누다 부랴부랴 귀가를 서두르는지도 모른다. 택시가 빈차라는 빨간 등을 켜고 아파트를 빠져나가기도 한다. 저런 움직임이 사는 모습이고 즐거움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언젠가 내게도 저런 새벽이 있었던가, 아련한 시간 속을 더듬으며 걸었다.

  아파트 구내를 벗어나 공원으로 갈까 하다가 새벽잠을 털고 하루를 여는 사람들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불빛이 줄지어 흐르는 천잠로 거리로 나갔다. 네거리의 신호등이 번쩍번쩍 점멸하는 가운데 택시와 작은 트럭, 승용차들이 새벽을 가르며 쌩쌩 달린다. 이미 그들의 아침은 시작되었다. 조금 더 걸어가는데 저쪽 네거리의 점멸하던 신호등이 켜지며 녹색 등에서 노란색을 거쳐 붉게 변한다. 아침 6시가 되어 깜박거리던 신호등이 작동을 시작한 것이다. 멈추어서 신호를 기다리는 승용차 옆을 스치듯 대형 운반 차량이 신호를 무시하고 마구 달려간다.

  달리는 차의 소음이 거슬려서 새벽 산책이나 할까 하고 공원길로 막 들어서는데, 차들이 무섭게 달리는 대로에서 무언가 반짝이며 움직이는 게 보였다. 멈춰서 자세히 보니 어두운 새벽길에서 쓰레기를 주워 치우는 환경미화원의 야광 어깨띠에서 반사하는 빛이었다. 차량 통행이 뜸하긴 하지만, 과속 차량이 질주하는 위험한 도로 위를 오가며 쓰레기를 쓸고 줍는 이들, 추위를 막을 옷이라도 제대로 입었는지, 과속 차량이 졸음운전을 하다가 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걱정을 하며 바라보다가 막 고개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 급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승용차 한 대가 그를 덮칠 듯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그의 X자 어깨띠가 번쩍시야에서 사라지고 자동차도 멈추었다. 순간 나는 그가 차에 치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해서 달려가서 보려고 했다. 그런데 다시 그의 어깨띠가 보이더니 달리던 차를 향해 뭐라고 몇 번 손짓을 하고 이내 다시 갓길을 쓸기 시작했다. 멈추었던 자동차도 가던 길을 가고 도로에서는 아무 일 없었던 몇 분 전의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오로지 어깨띠의 반사판만 믿고 일하는 그는 그런 일이 흔하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길을 쓸고 쓰레기를 주우며 금세 저만치 멀어져 갔다. 멀리서 바라본 나만 놀란 가슴이 되었고 그는 일상적인 위험 속에 뛰어들어 목숨을 길거리에 내놓고 밥을 벌고 있었다.

  산 자들의 새벽 시간은 날 선 추위나 어둠, 위험 따위에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생명을 잇는 일은 낭만이나 연습이 아닌 아슬아슬한 실전이라는 걸 새벽의 환경미화원은 잘 보여주었다. 나의 부모세대와 내 젊은 시절에도 저렇게 새벽이 열렸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추웠고 입은 옷은 얇아 열심히 움직이지 않으면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부모라는 이름은 얼마나 무겁고 큰 짐이었던가? 부모는 딸린 식솔을 모두 책임지는 가정의 기둥이었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부모를 의지하고 따르는 자식들의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자식을 위해 내 한 몸쯤은 쉽게 던지는 부모였고 그 부모를 따르는 자식의 마음은 절대의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 시대에는 춥고 가난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이라는 따뜻한 흐름이 있었다.

  새벽을 몸으로 안아보려 나선 산책길에서 아픈 삶의 현장을 만나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런 새벽에 위험을 무릅쓰는 일쯤은 흔한 삶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런 삶에 비하면 내가 남은 시간을 위하여 자전거를 비벼 힘을 키우고 맑은 공기를 탐하는 일이 과연 잘하는 짓인지도 생각했지만, 쉽게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저 나도 이 광대한 우주의 한 부분이니 그 흐름에 티끌 같은 존재로 실려 갈 뿐이라고 마음을 다독거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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