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지코지 바람의 언덕
섭지코지 바람의 언덕
  • 전주일보
  • 승인 2019.01.1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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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정 정 애/수필가

누가 내게 산과 바다 중 어느 쪽을 좋아하느냐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산이라고 대답해 왔다. 산에 가수많은 나무가 어우러져 뿜어내는 청량한 공기가 있고, 졸졸 흐르는 계곡물에서 피어오르는 촉촉한 습기로 내게 건강을 듬뿍 안겨주는 행복감이 있어서다.

그런데 요즘엔 바다가 그리울 때가 간혹 있다. 일상을 탈출하여 어디론가 훌쩍 떠나보고 싶은 일말의 충동인 것 같기도 하고, 탁 트인 바닷가 바람을 맞으며 어수선한 머릿속을 시원스레 날려 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다.

지난겨울을 채 벗어나지 않은 2월 하순에 교직에 근무하는 둘째 딸이 학년 말 방학인데 제주도에 가자고 권해왔다. 겨울이 지루하던 참이라 흔쾌히 따라나서기로 했다.

군산에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팔순을 코앞에 둔 지금 평범한 나들이에 불과한 것인데도 어제저녁부터 내일 소풍 떠나는 소녀처럼 잔잔한 설렘이 일어서 잠을 설쳤다.

전에도 제주도에 몇 차례 가본 적이 있다. 그러나 갈 때마다 새로운 얼굴을 가진 명소들이 많아서 섬에 불과한 제주도가 참 넓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3박 4일 일정으로 떠나는 이번 여행에 둘러볼 곳도 대부분 가보지 않은 곳이어서 기대가 컸다.

여행 3일째 되는 날, 목적지는 섭지코지라는 예쁜 해변이었다. 전날 저녁에 제주도 지도를 펼쳐 보니, 섭지코지는 육지가 길게 바다를 헤집고 뻗어 나간 성산 일출봉과 비슷한 지형이었다. 진입하는 입구 쪽을 빼고는 3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섭지코지를 소개하는 안내 책자를 보니 에메랄드 고운 빛깔의 바닷물이 맑고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서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 했다. 특히 <올인>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 촬영지가 된 뒤부터는 더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어 여행객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날마다 하늘이 푸르른 것은 아니었다. 새벽에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먹구름이 잔뜩 덮인 하늘이 쾌청한 날씨는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이 들었다. 성산 읍사무소에서 10여 분을 더 달려 도착한 해변이 섭지코지였다. 예상했던 대로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덮이고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금방 빗방울이 몰아칠 것 같은 날씨다.

먼저 슈퍼마켓에 들러 우산과 비옷을 샀다. 합성목재 테크 산책로에 접어들 무렵 빗방울이 제법 세차게 떨어졌다. 거센 바람도 함께 불어 비옷을 입고 우산을 받았지만, 자연의 거대한 힘에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바다와 접한 낭떠러지 산책길 목책 울타리 근처를 지날 때, 요동치는 파도와 몸을 날려 버릴 듯 세찬 바람이 무섭게 몰아쳐 왔다. 5미터쯤 갔을까? 금세 바람이 우산을 부숴서 날려 버리고 비옷도 벗겨버렸다. 바람이 비옷이나 우산 따위의 눈가림에 역정을 내는 듯 무섭게 몰아쳐 왔다.

해마다 이맘때에 겨울을 몰아내고 봄을 펼치려는 폭풍의 전쟁이 일어나곤 한단다. 집채만 한 파도가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몰아치는 가운데 위험을 무릅쓸 수 없어서 해변 산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의 언덕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해내는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이런 바다의 전쟁을 통하여 심해까지 침전되었던 찌꺼기들이 뒤집혀서 바닷속이 깨끗해지고, 깊은 바다의 영양소를 끌어 올려 작은 프랑크톤이 번성하게 하고 물고기가 잘 자라게 한다고 한다. 또, 겨울을 몰아내고 봄을 맞이하는 자연현상이라 한다. 자연의 위력은 인간이 감당하기에 불가능한 것이라는 걸 절실히 느끼는 오늘이다.

내 나이 여섯 살 때(1945년)에도 오늘처럼 엄청난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바람을 해방 바람이라고 불렀다. 그 바람은 우리집 뒤뜰에서 큰 키를 자랑하던 가죽나무 두 그루를 뿌리째 뽑아 넘어뜨려서 우물가를 거쳐 장독대까지 기다랗게 뉘어 버렸다. 보리쌀을 갈던 돌확도 덮치고, 샘물을 길어 올리기도 난감했던 큰 재난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바람이 36년간 일제의 압박을 몰아내는 해방을 가져왔다 하여 귀한 바람으로 환영했던 기억이 난다.

무섭게 부는 태풍이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의외로 이로운 점도 많다고 한다. 세찬 바람으로 과수원의 부실한 과일을 한꺼번에 솎아버리고, 죽어 있던 나뭇가지도 부러뜨려 시원스레 제거해 내고, 나무를 괴롭히는 해충들도 바람으로 휩쓸어 날려 보내는 역할도 한단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다. 가지가 많든 적든 우리의 인생살이는 바람 잘 날 없다. 불어오는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우리의 몫이다. 어느 시인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고 했다. 흔들어 주는 바람이 있기에 시련을 이기는 슬기를 배우고 마침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세상에 남았다. 그 흔듦이 없었더라면 나는 오늘까지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아, 바람! 나는 오늘 바람이 얼마나 요긴한 존재인가를 새롭게 느낀다. 바람아 오라. 와서 나를 흔들어라. 내가 의미 없이 무덤덤하게 살지 않도록 늘 흔들어 일깨워라. 가슴 서늘하게, 때로는 뜨겁게 흔들어라. 바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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