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절의 여행, 낙엽을 읽다.
한나절의 여행, 낙엽을 읽다.
  • 전주일보
  • 승인 2018.12.2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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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백 금 종/ 수필가

가을의 또 다른 맛은 여행이다. 여행은 사전에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나서는 것도 신나는 일이지만, 생각날 때 미련 없이, 먼 미지의 세계로 훌쩍 떠나는 즉흥 여행도 나름대로 멋이 있고 묘미가 있다. 그래서 즉흥 여행은 순간 일탈을 꿈꾸는 자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여행은 인간관계를 확대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중요하다.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 되는가 하면 반감이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수필모임 후에 어딘가 떠나고 싶은 희망자를 찾았다. 큰 샘 수필 연구회 문우 네 분이 기꺼이 나선다. 모두 친구 같고 누님 같은 분들이다. 가을 무늬가 촘촘히 새겨진 또 하나의 추억 탑을 쌓을 수 있으려나 싶은 기대를 안고 출발했다.

내장산으로 향했다. 조금 붐비는 주차장을 지나 입구에 들어서자 단풍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잎을 떨군 나목들이 다가오는 겨울 앞에 담연히 서 있다. 멀리 중중히 이어진 산자락에 바람 뉘에 지친 퇴색한 단풍들이 부르르 떨고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불타는 단풍’이라고 불렸던 것이 벌써 이렇게 되다니….

그런데 언덕 모롱이 벌거벗은 나무 사이로 단 한 그루 단풍나무의 잎들이 곱게 물들어 아름답게 산골을 장식하고 있다. 내장산 단풍의 마지막 안간힘인 듯, 휘황찬란하기까지 하다. 군락을 이루어 붉게 빛나는 단풍을 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서운한 마음을 반 푼이나마 위무해 주는 듯하다. 아니 군락을 이루며 뽐내는 단풍보다도 더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든다. 희소가치의 위력을 아는 나무인지 아니면 늦부지런을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찬연하다.

같은 단풍나무인데도 일찍 잎을 떨군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저렇게 집착처럼 잎을 달고 있는 나무도 있다. 사시사철 반복되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같이 숨 쉬고 자랐거늘, 내장산이라는 같은 척박한 토양 속에서 이마를 맞대고 적응해 왔거늘, 어찌하여 이렇게도 차이가 날까? 알 듯 모를 자연의 일이다.

빈 공터마다 어디든지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다. 한때는 가을을 장식하는 꽃이라며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는데 이제는 조금 처연한 생각이 든다. 발끝에 무참히 짓밟히거나, 바람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모습이 쓸모를 잃어 팽(烹)당하는 인간사와 같다는 느낌이 들어 안쓰러웠다.

그러나 낙엽은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럴 때 낙엽은 마음을 투영하는 거울이다. 즉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서글픔에 쌓인 사람은 쓸쓸하고 처량한 모습만 보이려니 싶다.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는 아련히 사라져 간, 마음 아픈 옛 추억을 반추하고, 희망을 꿈꾸는 자는 내년 봄 새 생명의 자양분이 될 낙엽의 속뜻을 알아보리라.

그렇다면 내 모습은 낙엽 속에 어떻게 비추어질까? 예쁜 낙엽들을 주워 책갈피에 꽂아 넣으며 행복해하던, 새순처럼 풋풋한 어린 시절이 보였고, 녹음처럼 혈기 왕성한 청년 시절의 행복도 수채화처럼 그려졌다. 그러나 생에 지쳐 허덕이는 이웃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한순간만이라도 시원함을 베푸는 아량이 부족했다고 핀잔한다. 그리고 굽은 내 등허리까지 보인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비탈길을 비척비척 걸었던 내 아버지처럼, 아니 쇠락해 가는 저 낙엽들처럼…. 마지막 새겨두어야 할 일은 이타행(利他行)을 꿈꾸는 낙엽들의 몸부림을 알아야 한다고 그려 보인다.

낙엽들의 수런거리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며 조붓한 산길을 걷고 있는데, 늦가을 푸른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그 단풍나무에서 핏빛 단풍잎 몇 장이 소리 없이 떨어진다. 그래, 나도 저 낙엽처럼 머지않아 이 세상이란 나무에서 모든 것 다 버리고 떨어져 서천에 잠기겠지. 튼실한 열매 하나 거두지 못한 채,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쭉정이로 쓸쓸히 물러나야 하겠지. 종국에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자연의 순환 법칙일 터. 내 삶 또한 그 길을 따라가는 것 아닌가?

이런저런 상념이 가슴 가득 뭉클거리며 밀려오는데 문득 문우들의 웃음소리가 허공에 번진다. 어느 것 하나 감춤 없이 허심탄회하게 내지르는 저 웃음소리. 단풍처럼 곱고 온후하며 정갈한 원로 문우 한 분의 정담이 옆 문우들을 자지러지게 한다.

“첫사랑은 죽기 전에 꼭 고백해야 된다고, 죽은 뒤에야 안다 한들, 유효기간이 지나 쓸모없는 것이라고.” 지고지순한 여인상이라 무엇이든지 마음속에만 고이 간직하고 있는 분인 줄만 알았는데, 가을 마지막 단풍의 영향인지 뜻밖에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보인다. 모두가 순애보와 같다고 맞장단을 치면서 자기들의 지나간 첫사랑 추억을 절절히 풀어 놓는다.

“첫사랑도 낙엽을 닮았어. 화려한 시절도 있지만, 이제는 묻어두어야 하니까”. 조금 전 낙엽이 나에게 귀띔해 준 의미를 전하니 또 유쾌하게 웃는다.

마지막 가을에 등불처럼 매달려 있는, 선연한 단풍들과의 조우, 인생의 깊이를 생각게 하는 낙엽들과의 대화. 그리고 순진무구한 소녀로 되돌아간 문우님들의 웃음꽃이 어우러져 산골에 추색이 더욱 짙어진다. 오늘 한나절의 여행이었지만 단풍처럼 붉어가는 삶을 돌아보고 재충전하는 기회가 아닌가? 돌아오는 마음이 따뜻했다.

백금종/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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