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축제와 놀이판
눈의 축제와 놀이판
  • 전주일보
  • 승인 2018.12.27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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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12.21자)
황정현/수필가

검은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린다. 그 아리송한 검고 흰 경계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며 다만 가볍게 하늘거리는 모습으로 내리고 있는 눈을 본다.

가벼운 바람결을 타고 하강하는 하늘의 눈송이 춤판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저절로 경쾌해지기에, 그 아릿한 풍광을 즐기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송이송이 내리는 눈의 춤사위에 활짝 열리는 환희심으로 덜덜 떨었던 추위는 어디로 갔는지 눈 세계로 달려가는 동심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눈이 만들어내는 온갖 아름다움에 사람들의 정겹고 경쾌한 밝음으로 추위를 잊는 모습에 한동안 신기한 생각에 잠긴다. 산하대지에 눈이 내리다 쌓이는 곳곳마다 눈이 만들어내는 포근함과 정갈하고 고요한 감정이 일어 눈길을 걷는다.

가족과 이웃과 친지들이 도란거리며 눈덩이로 장난치거나 눈사람을 만든다. 덥석 눈 위에 눕기도 하고, 뒹굴기도 한다. 그 순간만큼은 현실의 온갖 시름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삶의 청아한 세계를 즐긴다.

그게 하늘이 주는 위로이며 자연이 주는 거룩한 은혜인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눈이 만들어주는 멋진 신세계에 사람들의 마음이 정갈해지고 정의롭게 된다면, 눈의 보배로운 역할은 비범한 경계를 넘어선 것이 되지 않을까. 흐리고 검고 음산한 구름에서 순결하기 짝이 없는 하얀 눈이 생성되어 펄펄 내리는 섭리가 어떤 의미인지 사유해볼 만한 이유가 있을 듯하다.

하지만 눈은 항상 긍정적인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처음 광경의 신선하고 맑은 순수임에도 쌓인 눈이 녹으며 들어나는 질척거림과 미끄러움과 보기 흉한 자취로 변하는 것에 실망감이 앞설 때가 많다.

자연 만물에 처음 탄생하는 아기와 짐승 새끼며 꽃봉오리들 그리고 새싹에 이르기까지 신기롭고 순결하며 경이롭지 않은 게 없다. 그럼에도 그 끝 모습은 낡고 시들어 추하고 초라하고 볼품이 없다. 온전히 변하지 않은 사물들만이 처음과 끝이 같은 모습일 것이다.

하물며 눈이 그런 사태와 무관한 처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극과 북극의 엄청난 추위의 세계에서나 혹은 만년설을 이고 있는 높은 산에서나 가능할 눈의 항시성은 우리의 관심의 영역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눈 쌓인 나라의 권력자들은 사냥을 즐겼다. 말을 타고 화살을 쏘며 토끼몰이 사슴몰이를 하는 병사들을 동원하여 눈 쌓인 산과 벌판을 달렸다. 추운 겨울에 움츠리고 있던 병사들을 조련하는 의미도 지닌 사냥은 눈 세계에서 더 즐기고 흥이 났었을 것이다.

우리 어린 시절에도 작은 야산에서 토끼 몰이를 했던 추억이 있다. 오늘날에는 화살이나 창 대신 총으로 바뀌었을 뿐 사냥의 행각은 바뀌지 않았다. 눈 내린 산야는 적막하고 고요한 풍경 속에 깊이 잠들었다가 갑자기 수선스런 사람들의 환호성과 외침으로 한동안 떠들썩한 사태에 젖곤 하였다.

눈이 쌓였을 때, 사람들이 즐기고 흥분하며 내달리는 야수성은 눈의 포근함과 부드러움으로 더욱 빛이 나는 충동이다. 우리는 그 사냥의 포획 경쟁에서 겨울 동계 올림픽의 연원을 살필 수 있다.

원래 겨울 사냥이나 스포츠는 서양에서 귀족들의 전용 오락이었다. 그런 사냥과 스포츠가 서민 대중에 이르기까지 일반화되어 퍼져나간 필연성으로 오늘날의 동계 올림픽으로 확대 정착된 것을 추론하는 바가 어렵지 않다.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고 경쟁하거나 언덕배기나 산등성이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스릴을 맛보는 인간 심리가 스포츠 경기의 경쟁으로 발전한 저간의 과정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다. 좀 더 빠르게, 좀 더 멋있게 어려운 곡선과 힘든 구비를 지나 인간의 질주본능을 만족시키는 겨울 스포츠가 가장 최적의 운동 경기로 발전했다.

특히 스키와 스켈레톤은 그 빠르기가 하계 올림픽에도 이룰 수 없는 최고 속도라고 볼 수 있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히말라야 고산 준봉은 평지와 다른 눈의 위엄과 공포를 지니고 있다. 흰 눈의 아취와 장엄한 설산에 취해 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등산가와 스키어로 나누어 질 수 있겠다.

물론 아주 오랜 옛적에 생필품 등을 등에 지거나 말에 싣고 눈 쌓인 험산을 넘는 장사꾼도 있을 것이다. 또한 도망꾼이나 망명객들도 추적대를 피해 굶주림과 동사(凍死)를 극복하고 넘나들었던 바가 있었을 것이다. 눈의 미끄러움의 위험 외에 눈사태로 말미암아 설산의 눈에 파묻혀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눈이 가벼운 놀이터를 만드는 경쾌한 즐거움 외에 죽음의 거친 장막을 숨겨놓고 있음을 본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평창에서 열렸던 동계 올림픽 경기는 눈과 얼음 위의 환상적인 축제이며 놀이판이었다. 얼음이나 눈 위에서 사람들은 늘 미끄러진다. 즐겨서 미끄러지기도 하고 밀쳐서 미끄러지기도 한다.

미끄럼 타는 흥취와 놀이 본능의 최상에서 가장 멋있게 춤추는 자를 가려내는 올림픽이 진정한 의미의 눈과 얼음의 축제이다. 미끄럼을 타는 즐거움이, 미끄럼을 제 맘대로 조절하는 기술이 누가 가장 우수한가를 가리는 경기는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는 흥분과 긴장을 야기한다.

스키든 스케이트든 조절기술의 미숙으로 넘어지면, 경기에서 이길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겨울의 하얀 동화가 꽃피는 눈 위의 장엄한 축제가 다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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