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 중 · 러 역사 연대가 필요하다
한 · 중 · 러 역사 연대가 필요하다
  • 전주일보
  • 승인 2018.12.05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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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제 / 언론인

인도 독립의 아버지는 마하트마 간디다. 우리는 인도의 독립은 간디가 이끈 비폭력저항 운동이 이루어낸 성과이며, 따라서 인도 독립의 공은 대부분 간디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도의 독립을 위해 간디와는 다른 노선으로 투쟁하며 간디에 못지않은 공적을 남긴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수바스 찬드라 보세’다. 그는 간디와 함께 투쟁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무력항쟁 주의를 주장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1897년에 인도의 오리사 주에서 태어난 보세는 캘커타 대학을 졸업한 후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했고, 1921년에 간디가 주도하던 반영비협조운동에 투신한 인도의 최고 엘리트였다.

1937년과 1939년 국민회의파 의장까지 지낸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간디에게 무력봉기를 호소했다. 하지만 오히려 식민 당국에 체포되었다. 가택연금 중 극적으로 탈출한 보세는 소련의 스탈린에게 협력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고 독일로 망명한 보세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에게도 협력을 요청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히틀러는 “인도의 독립은 앞으로 150년 더 걸릴 것이다”며 협력을 거부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보세는 일본과의 협력을 희망했다. 그의 이용가치를 깨달은 일본은 독일 정부에 부탁하여 독일해군의 잠수함 U-180을 타고 인도양까지 이동, 인도양에서 일본해군의 잠수함인 伊 29호로 갈아타고 도쿄에 도착한다. 일본의 지원을 얻은 그는 1941년 10월 21일 일본 통치하의 싱가포르에서 ‘자유인도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이어 영국령 말레이와 홍콩에서 포로가 된 영국군 인도인 병사 4만5천 명을 중심으로 3개 사단을 창설하여 ‘인도국민군(INA)’이라 명명하고, 최고사령관에 취임했다. 보세는 곧바로 영국에 선전포고한 후 일본군과 함께 인도 본토로 진격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임팔작전 패배와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자유인도 임시정부의 유지도 어려워지자 보세는 독립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소련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대만의 쑹산(松山)비행장에서 탑승한 일본의 97식 중폭격기의 추락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인도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자유다”였다.

그가 부활한 것은 2016년 1월 인도 모디 총리가 “영국이 승전국임에도 서둘러 인도를 떠난 것은 간디가 아닌 보세가 조직한 인도 국민군 때문이었다.”라는 내용의 보세 관련 영국 기밀문서를 100점을 공개하면서부터이다. 네루가 찬드라 보세를 “전범‘으로 지목한 기록도 발견돼 인도가 발칵 뒤집어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인도는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지던 간디와 네루의 비폭력 운동을 비판하고 무력항쟁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인도식 ’역사바로세우기‘인 셈이다.

인도의 역사바로세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인도의 역사바로세우기에 일본이 끼어들면서 침략의 역사가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은 보세와 일본의 인연을 강조하며 ‘역사 연대’를 부르짖고 있다. 인도를 방문한 일본의 아베 수상이 찬드라 보세의 후손을 만나 “많은 일본인이 올곧은 항쟁을 펼친 보세에 깊이 감명받았다.”라는 등 아첨을 일삼는가 하면, 인도국민군이 일본군과 함께 싸운 점을 내세우며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2014년부터 일본 자위대가 인도 군대와 합동훈련을 펼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침략전쟁을 마치 인도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던 양 꾸며대고 있는 일본의 행태는 그야말로 후안무치(厚顔無恥)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이 같은 역사 왜곡이 국제사회에 먹혀들고 있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가장 중요한 주변국인 중국과 러시아와의 역사 연대(連帶)에 관하여 우리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1920년 레닌의 한민족 독립자금 지원문제는 한 · 러 양국의 우의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3.1운동에 감명받은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2백만 루블의 독립운동 자금을 원조받기로 했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동휘는 한형권을 시켜 40만 루블을 상해로 들여왔다. 그때 40만 루블은 지금의 100억 원대의 가치다. 이 사실은 명백하게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뿐인가. 한국과 중국의 공동 항일투쟁사는 수십 년이 넘는다. 1945년 8월 해방에 이르기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손을 맞잡고 일본군과 싸웠다. 만주의 독립군이 그랬고 중경의 광복군이 그랬고 태항산의 조선의용군이 그랬다. 우리는 일본 패망 순간까지 중국과 함께 일본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던 나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과 중국 러시아 간의 ‘역사 연대’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더 늦기 전에 역사학자들은 한·중·러 간의 역사 연대를 위한 역사적 진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과 국가 지도자들에게 소상하게 설명해야 마땅하다. 지금이야말로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중·러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내년 3.1 운동 100주년,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일본과 함께 싸운 이들 러·중 두 정상을 초청하여 행사를 갖는 것도 검토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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