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을 환영하며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을 환영하며
  • 전주일보
  • 승인 2018.11.1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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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황토현 전투에서 농민군이 크게 이긴 5월 11일로 정했다. 그동안 정읍시와 고창군, 전주시 등이 서로 지역에 관련된 날을 기념일로 정하려 의견이 분분했던 것을 어느 시군이 주장한 날이 아닌 황토현 전투 전승일로 선택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사실 이 결정은 좁은 땅덩어리에서 사사건건 지역주의를 앞세우는 전북인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와 실질적인 명분도 있어서 퍽 다행스럽다.

고부에서 1984년 음력 정월에 처음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군수 조병갑을 쫓아내고 폐정을 개혁할 것을 요구하는 선에서 끝날 사건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들을 다독이라고 보낸 안핵사(按覈使) 이용태가 되레 농민들을 잡아서 곤장을 치며 모조리 잡아들이려 들자 전봉준은 고창 무장에서 농민군을 모아 3월에 정식으로 관군에 대항하며 썩은 정치를 바로잡겠다는 태세를 갖추게 된다.

음력 3월에 고창 무장에서 기포한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의 농민군은 김제시 백산면에 이르자 8,000명으로 불어났고 음력 4월 전라감영 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날이 음력 4월 7일(양력 5월 11일)이다. 여세를 몰아 음력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함락하고 5월 7일에는 새 전라감사와 전주 화약(和約)을 맺어 폐정 개혁을 약속하고 전라도 여러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짧은 기간이나마 농민이 지방정치에 참여하는 역사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는 농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보면서 깨우치고 민중의 힘을 새롭게 인식했다는 데에 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농민군에게 관군이 크게 패하자 당황한 정부가 청나라와 일본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면서 새로운 불행이 시작되었다. 그 뒤에 동학군은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참혹하게 희생되었지만, 민중의식이 깨어 나라가 임금의 것이 아닌 것을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간악한 일본은 사태가 끝나고도 돌아가지 않고 용산에 주둔하기 시작했고 을미사변, 을사늑약, 1910년 국권강탈을 자행하기까지 우리 전라도에서는 수없이 많은 의병이 일어났고, 일본의 간악한 침략에 대항하여 싸우고 그들을 괴롭히는 저항을 계속했다.

특히 우리 전북인들은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우리끼리는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 작은 이익을 두고 지역간 다툼이 잦고 사소한 일로 반목한다. 하찮은 일로 사생결단이라고 할 듯이 싸운다.

이번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도 고부 관아로 쳐들어간 날, 무장 기포일, 전주 화약일 등을 서로 주장하며 합의를 이루지 못하자 정부가 어느 날도 아닌 황토현 승전일을 선택했을 것이다. 우리가 합의해서 정부에 지정해 달라고 했더라면 보기 좋았을 것이다. 제발 우리끼리는 싸우지 말자. 우리는 농민혁명가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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