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진 날, 푸진 공연
푸진 날, 푸진 공연
  • 전주일보
  • 승인 2018.11.0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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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수필가

가을이 깊었다. 하늘도 깊어졌다. 깊고 푸른 하늘이다. 땅도 가을빛으로 가득 찼다. 새벽녘 풀잎에 몰래 내린 이슬 따라 내려온 가을이 온 세상에 범람했다. 넘쳐서 더 넉넉한 가을이건만, 결코 혼자 다 소유하지는 않는다. 자연에 기대어 사는 모든 것들과 공유하며 함께 즐긴다.

그중에서 으뜸은 가을이 펼치는 푸지고 황홀한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날 지긋지긋했던 폭염을 이겨내고 알알이 익은 곡식과 저마다 울긋불긋 어울리는 의상을 차려입은 나무와 꽃처럼 쟁쟁한 출연진들의 무대 인사를 시작으로 화려한 공연을 볼 수 있어 좋다.

귀뚜라미, 찌르레기, 여치 등 벌레 밴드의 효과 음악도 근사하다. 산과 들을 달려온 바람은 “가을 공연 있어요. 보러 오세요.”라고 속삭이고 소리치며 달린다. 짙푸른 하늘은 뭉게뭉게 구름 애드벌룬을 띄워 공연을 자축한다. 운 좋은 날에는 제시간에 떠나지 못한 여름의 끄트머리가 진초록빛 카메오로 출연하여 설익은 열매나 푸른 잎을 덤으로 보여주니, 관객은 일거양득이다.

산마다 눈부시게 번져오는 가을빛, 황금 들녘, 말수는 적어도 넉넉함이 묻어나는 사람 같은 그런 가을이다. ‘가을 들판이 딸네 집보다 낫다’는 속담처럼 그저 황금빛 들판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부르고 마음이 뜨시다. 가을엔 만석 지기가 아니어도 눈에 들어오는 들판이 다 내 것이라 여겨도 될 만큼 넉넉하고 너그러운 계절이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성미산에도 가을빛이 넘치도록 찰랑거린다. 겹겹이 껴입은 단풍 옷에 홀려 천년의 세월을 흐르던 오원천도 가을을 껴안고 뒤척인다. 물결은 비늘 달린 물고기처럼 내 눈에 시나브로 낚여 빛나고 내 심장은 노을빛 단풍이 들어 타오르기 직전이다.

이때에는 강도 산도 한통속이니 굳이 시간을 내서 가을을 감상하겠다고 멀리 나갈 필요는 없다. 이렇듯 눈에 뵈는 모든 자연이 가을의 공연장이고 축제마당이다. 매일 오가는 길가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강가에서, 그리고 매일 쳐다보던 하늘에서도 가을을 본다. 그들이 그려내는 그림만으로도 가을은 넘쳐난다.

가을의 끄트머리를 물고 흐느끼는 풀벌레 소리는 사랑하는 임을 보내는 흐느낌처럼 애처롭다. 극성스럽던 여름을 견디고 맞이한 넉넉한 가을을 보내야 하는 마음이 마치 종영되는 드라마처럼 아쉽다. 그러니 '더 타게 놓아두자, 더 솔직하게 목 놓아 통곡하도록 숨죽여 서성이기만 하자.' 그리 배려하지만, 막판까지 제 몸을 흔드는 이파리들의 아우성은 어찌하지 못했다.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타오르는 소신공양이었기 때문이다. 푸른 손짓으로 온 여름을 보내고서도 손 놓지 못하고 목숨처럼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살다가, 아무런 미련 없이 떨어져 새봄의 잎을 밀어 올리는 한 점 거름으로 썩어들 때를 기다리느라 바람에 뒤척이는 것이다.

‘그렇구나! 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낙엽 한 잎, 한 잎 떨어뜨리면서 오는 것이구나. 한순간 남실바람 불어 낙엽 하나 주섬주섬 불타는 심장 갈피에 끼우면서 세월 속에 묻어뒀던 이름 하나 꺼  내도 무방한 일이구나. 이제 저 너른 들판의 황금빛이 하나둘 거둬지면 찬 서리가 내리고 겨울이 오겠지. 들판을 스쳐 가는 겨울바람 소리에 행여 누가 찾아왔나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 마음처럼 가만히 창문을 열어보며 봄을 기다리듯’

내가 이렇듯 한 계절을 보내면서 많은 생각으로 서성이든 말든 들녘은 또다시 분주하다. 비운 만큼 따뜻함으로 채워야 하는 겨울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기 위한 리허설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가장 화려한 의상으로 출연했던 나무들이 가장 먼저 색을 벗어내는 성의를 보인 만큼 한 해의 마지막 공연도 기대된다. 관객은 겨울날이 겨울 같다고 느낄 때 따뜻함의 고마움을 더 알 게 될 것이다. 그 또한, 가을의 공연이 잘 마무리했을 때 가능한 일이겠지만.

문득 시들고 빛바랜 우리의 열정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답을 찾으려고 주변을 둘러보니 텅 빈 자연의 무대가 사람들이 떠나간 피서지처럼 공허하다. 한 해 한 해 비울 것이 점점 많아지는 내 삶처럼 씁쓸하다. 그래도 아낌없이 다 주고 떠나는 나무 아래 서서 주는 사랑이야말로 완전하고 진정한 사랑임을 본다.

낙엽은 힘 떨어지고 위세 떨어지면 살 비비고 함께 하는 사람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것을, 가장 낮은 종착지에 땅이라는 안식처가 있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준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날 부축할 누군가가 있다는 안도감을 배우는 것이다.

낙엽 한 장이 제가 온 곳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저 혼자 돌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태 보듬었던 햇살을, 여태 뿌리를 통해 마셨던 생명수를, 여태 잔가지 흔들며 놀아주던 바람을, 그리고 날마다 들려주던 새들의 노래를, 날마다 살 비비며 살던 이파리들의 사랑을 추억으로 함축해 가져간다. 그래서 갈 때도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다.

추억은 언제 어디서나 꺼내볼 수 있는 늘 편안한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누구에게 얼마만큼 베풀고 살았는지, 얼마만큼의 추억으로 남길 사연을 품고 있는지. 텅 빈 들녘처럼 마음을 비울 수 있을지 생각하며 저 낙엽들이 후회 없이, 부끄러움 없이 돌아가는 그 의연함을 배우며 살아야겠다.

오늘 공연은 참 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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