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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주민등록증금요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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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25  16: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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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운/수필가

내게 생물학적으로 당신들의 유전자 절반씩을 물려주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아련하고 그립다. 그리움 속에서 그분들이 내게 주신 사랑과 가르침을 위한 훈육의 기억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아픔과 서운함까지 한꺼번에 오랜 영화의 장면처럼 스쳐갈 때, 나 또한 그분들이 걸었던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음에 소스라친다.

얼마 전에 묵은 것들을 정리하다가 69년에 발행된 내 아버지의 비닐접착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가로 길이가 좁고 세로가 긴 용지에 작은 사진을 붙이고 철인이 찍힌 주민등록증에는 이름 석 자와 1905년 5월 20일생이라고 적혀 있고 낯선 주민등록 번호가 적혀 있었다. 사진의 아버지는 구레나룻이 넉넉한 관운장 수염을 탐스럽게 내려뜨리고 근엄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계셨다.

지금의 주민등록증이 시행되기 전에 비닐접착 방법으로 쓰이던 증명서. 태극 문양에 무궁화가 그려진 바탕에 쓰인 글씨와 사진, 분명히 증명서의 모양이지만 증명서에 적힌 글씨나 사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한 그림으로 존재할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의 인적사항과 사진, 그리고 통용되지 않는 증명의 형태까지 단 한 가지도 현실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하지만, 사진 속의 모습은 아직도 내 아버지이고 금방이라도 내게 근엄한 표정으로 말을 하실 것 같다. 항상 근엄하고 무섭던 아버지, 9남매가 비뚤어지지 않도록 길러내시느라 위엄을 버릴 수 없었으리라 생각하지만, 눈에 벗어나는 기미가 보이면 누구든 예외 없이 무섭게 매질을 하셨다. 나는 막둥이 아들이라고 비교적 너그럽게 봐주시는 듯했지만, 내 초등학교 입학원서를 동사무소에 가서 받아오라는 명령을 어기고 1Km거리를 도망치다가 기어이 잡혀 된 매를 맞고 울면서 동사무소를 찾아갔던 일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아버지의 말씀은 바로 법이었고 어기는 일이 있으면 예외 없이 추상같은 체벌이 떨어졌다. 항상 ‘여일령시행(如一令施行 : 한번 떨어진 명령은 반드시 행하라)’을 말씀하시던 아버지. 지금 세상 같으면 아동 폭력으로 고발이라도 당하셨을 독재자이셨다.

아버지는 막둥이인 날 꼭 껴안고 주무셨다. 내가 잠에서 깨어 소변이라도 볼라치면 그 품에서 빠져나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금씩 움직여 품을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빠져 나와서도 오줌을 누고 나면 다시 그 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초등학교 4학년 쯤 추운 겨울방학 때였다. 전주천에 아침 일찍 썰매를 타러 나갔다. 해가 뜨면서 날씨가 풀려 얼음이 점점 얇아지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썰매를 거두어 밥을 먹으러 갔다. 하지만 얇아지는 얼음 위를 썰매로 짓쳐 나가면 얼음에서 쩡! 쩡! 금가는 소리가 들리고 아슬아슬했다. 잔금이 간 얼음 위로 썰매가 빠르게 지나가면 얼음 사이로 물이 스미어 나오면서 얼음이 휘-청 내려앉다가 다시 평평해지는 느낌이 스릴 만점이었다.

그러나 점점 더 녹아가는 얼음이 언제까지고 견뎌줄 리가 없었다. 얼음 위로 물이 흥건하게 배어 올라온 위를 재빠르게 지나가려는 순간 바닥이 푹 꺼지면서 나는 썰매와 함께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각오하던 터라 빠지는 순간 약간의 숨을 들이쉬었고 물이 깊지 않으므로 바로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얼음장이 꺼진 데서 관성으로 주욱 밀려가 머리 위에 얼음이 막혀 일어설 수 없었다. 얼음이 얇아서 일어서면 깨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얼른 몸을 낮추어 내가 빠진 얼음구멍을 확인하고 썰매까지 챙겨 들고 엉금엉금 기어서 가까스로 물 위에 머리를 내밀었다. 꺼지는 얼음을 부수어가며 겨우 냇가로 나왔다.

추운 날씨에 젖은 옷으로 나오자 금세 옷이 얼어 버석버석했다. 그때 서야 춥다는 걸 실감하고 얼어 버석거리는 몸으로 사시나무 떨 듯하며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에게 들킬세라 가만가만 뒷방으로 돌아가서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아랫목에 들어갔다. 따뜻한 방에서도 한참 동안 몸이 떨렸다.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문득 잠이 깨었는데, 아버지가 날 안아 올리는 순간이다. ‘아뿔싸- 들켰구나’ 생각하니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하다. 또 매 맞을 짓을 하다 들킨 것이다.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하며 이 위기를 벗어날 궁리를 하는데, 안채 마루를 내려가 어디로 가는 눈치다. 발가벗은 나를 밖에다 내치려나 싶어 놀라서 얼른 눈을 떠보니 행랑채 목욕탕이다.

물바가지로 따뜻한 물을 퍼서 내 몸을 헹구어 목욕 솥에 넣어놓고 당신도 옷을 벗고 둘어온 아버지는 따끈한 물속에서 날 꼭 안아주면서 “이놈아 빠졌으면 얼른 나와야지 썰매까지 챙기냐? 그러다 큰일 나는 거여”하신다. “아부지가 봤어?” “그려, 봤다. 물에 빠질 때 내려가서 데리고 나오려는데 쥐같이 약게 잘도 나오더라. 물이 깊었으면 어쩔뻔했냐” 아버지는 다시 날꼭 껴안고 한참을 그렇게 계셨다.

아버지는 제방 위에서 내가 물속에 들어가는 걸 보고 뛰어 내려오려는데 내가 빠진 구멍으로 되돌아 나오자 얼른 집에 와서 형들에게 목욕물을 데우라고 하셨던 것이다.

빛바랜 비닐접착 주민등록증 속의 아버지는 오늘도 손톱만 한 빈틈이 없을 듯 근엄한 표정으로 날 보고 계신다. 당신 생전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된 막둥이 아들을 그때처럼 내려다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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