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의 대명사 막걸리
수난의 대명사 막걸리
  • 전주일보
  • 승인 2018.10.18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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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전통술 하면 '막걸리'가 떠 오른다. 쌀농사를 기반으로 오랜 기간 민족과 애환을 함께한 술이었다. 쌀과 누룩, 물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빚을 수 있어 농가마다 술을 빚었다. 박목월은 그런 풍경을 시(詩), 나그네에서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 목가적으로 표현했다.

형편이 좋은 집은 쌀로, 없으면 멥쌀, 더 없으면 보리쌀로 빚은 관계로 술맛은 천자 만별이었다. 물맛 좋기로 소문난 고을은 막걸리 맛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때부터 누구나 쉽게 빚어 먹던 막걸리에 수난이 찾아온 것은 일제 강점기다. 일제가 막걸리에 세금을 매기면서 개인에게는 막걸리 주조를 금지한 것이다. 그래도 가끔 술꾼들이 그 맛을 못 잊어 몰래 빚어 마셨다. 그러다 걸리면 여지없이 가혹한 벌금을 내야 했다. 막걸리는 어느새 몰래 만들어 먹는 술, 이름하여 '밀조주'로 변해 버렸다.

광복후에도 막걸리 수난은 계속됐다. 60년대 박정희 시절 부족한 쌀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막걸리는 기피 대상이었다. 쌀대신 밀가루로 빚게 했다. 그 결과 맛도 없고 숙취만 오래 가는 '사이비 막걸리'라는 오명을 얻었다. 70년대 초에는 일부 악덕업자들이 누룩 대신 값싼 공업용 알콜을 사용, 이를 마신 사람들이 죽는 사고까지 발생한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살인 막걸리'였다. 누명을 쓴 막걸리는 살인이라는 치명타를 맞고 사라진다.

한동안 자취를 감춘 막걸리가 다시 등장한게 1977년께 부터다. 쌀막걸리 주조가 허용 되면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맥주, 양주, 와인 등에 밀려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한다. 그러다 제자리를 잡은 것이 2000년대 초다.

그런 막걸리가 괜한 싸움에 휘말려 또 고생이다. 최근 맛 컬럼니스트 황교익씨가 막걸리 논란에 불을 지폈다. 방송인 백종원씨가 한 청년 상인에게 블라인드 막걸리 테스트를 한 것이 논란의 발단이다. '백종원 골목식당'에서 12종류 막걸리 맛을 테스트 했는데 12종류 막걸리 맛을 백씨가 신통하게 맞추었다. 황씨는 이와 관련해 "신이 아니고서야 12종의 막걸리를 맛보고 브랜드를 맞출 수는 없다"고 방송의 비상식을 공격했다.

그러자 다수의 네티즌들은 "다양한 막걸리를 소개 하기 위한 예능 장치였을 뿐이다"며 백씨를 옹호하고 나서며 황씨에게 반격을 가했다. 오락적 요소를 주기위해 제작진이 백씨에게 사전에 막걸리 맛을 알려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둘 다 맞다. 신이 아닌 이상 막걸리 종류 12가지를 맞추는 것도 문제지만 "원래 예능프로는 그런 것 이다. 골목 상권 살리는데 웬 시비냐"는 사람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막걸리 맛은 일제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괜히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막걸리에 이런 저런 시비를 건다. 우리의 전통술, 막걸리가 무슨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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