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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둥 울리는 시간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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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11  18: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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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정 현/수필가

스산한 가을 황금빛 들녘을 건너 산모롱이 나뭇잎들이 바람에 실려 끝없이 굴러간다. 낙엽의 상징성은 자연의 순환과 생멸의 과정에 닿아있다. 한 치도 자연의 이 법에 어긋나는 불가역적인 현상은 없다.

낙엽에 대한 쓸쓸하고 비감스런 생각은 인간의 설익은 애상에 불과하다. 어떤 정서적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낙엽을 인간의 죽음에 빗대 허무의 늪에 빠져 처연한 감상에 젖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앙증맞은 새싹과 새순들이 지상에 푸르게 솟아오르면 온갖 생명의 찬가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생기가 돌아 살맛나는 세상을 구가하며 천년을 살 것처럼 노래를 부른다.

생자필멸의 원칙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에 적용된다. 벗어날 수도 비켜갈 수도 없는 운명적인 필멸(必滅)의 대명제 앞에서, 인간은 종교의 그늘을 찾아 구원을 간구하고 영생의 꿈을 실현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럼에도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무수한 종교가 활개치고 영생을 위한 끝없는 노력을 했지만, 죽지 않거나 사라지지 않은 생물체는 없었다. 시간은 북을 둥둥둥 울리며 차례차례 죽음에 대한 복종을 기다린다. 절망스럽고 가슴을 옥죄는 심정이 누구에게나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할 때마다 전신에 덮치곤 한다. 나는 특히 성삼문의 절명시를 생각할 때마다 그런 처절한 절망감과 두려움을 맛본다.

擊鼓催人命 (격고최인명) 둥둥 북을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네
回首日欲斜 (서풍일욕사) 고개 돌려보니 해는 서산으로 기우는데
黃泉無客店 (황천무객점) 황천에는 주막도 없다는데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오늘 밤엔 누구 집에서 쉬갈거나.

성삼문(1418 - 1456)은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데, 그때 읊은 시가 바로 절명시이다. 형장에서 북소리가 둥둥둥 울리면, 망나니의 칼날이 성삼문의 목을 내리치게 된다. 이 순간 성삼문이 갖게 될 절박한 심정을 어떻게 촌탁(忖度)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된다.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는 세상과 작별하는 생명의 끝이고, 주막집 술맛을 영원히 잊어야 하는 한없는 허무이며, 단종 복위의 꿈과 명분이 무너지는 절망이다. 다소나마 긴 시간이 아니라 짧은 초침으로 육체와 영혼의 문이 닫히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한 초탈의 경지로 자신을 내맡기고 죽음을 기다리는 심경이 어땠을까. 

일설에 의하면 성삼문의 출생 시간을 늦추기 위해 그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자궁 위에 돌을 얹어 산도를 누르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출산의 이모저모를 돕기 위해 성삼문의 할머니가 옆에서 지켜 앉아 있었는데 문밖의 할아버지가 소리를 쳤다. ‘시간을 늦춰라! 하늘의 운기가 아직 그의 시간을 열지 않았다!’ 산도를 뚫고 나오려는 아기를 돌로 눌러 억제하고 할머니는 세 번이나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이제 돌을 치울까요? 그런데 아직 더 기다리라고 소리치는 순간 돌을 밀치며 아기가 나왔다. 할아버지는 탄식하며 그 자리를 떴고, 세 번 묻고 나왔다 해서 삼문(三問)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다. 돌을 밀치고 나온 성삼문은 운이 드셌던지 세조의 회유를 물리치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초연히 죽음에 임했다. 

둥둥둥 시간의 북소리는 살아있는 모든 인간에게 들리는 죽음의 예고 소리다. 시간의 망나니가 울리는 북소리를 눈과 귀로 천둥소리 듣듯이 느끼는 사람은 죽음이 경각에 이르렀거나, 그 의미를 폐부 깊이 찌르는 공포로 체감하는 사람일 것이다. 아득하고 멀어서 북소리의 흔적조차 감지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북소리를 일부러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 북소리의 크고 작은 울림은 살아있는 모든 유기체에 공포를 준다. 우리는 살아가는 생명의 시간 동안 아무리 많은 사연과 업적, 명망, 재산이 있다 해도, 그 삶의 행적과 관계없이 미완의 조각으로 죽어간다. 우리 모두에게 시간의 북소리가 얼마나 멀거나 가까이에서 둥둥둥 울리고 있는가. 혹시 성삼문의 처지처럼 스산한 가을바람 속에 해는 서산에 지고, 쓸쓸한 주점에서 초연하게 술로 목을 축이는 마지막 비장한 여유는 있겠는지. 

프랑스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는 그의 시에서 “명심하라. 시간은 열렬한 도박사라는 것을. 속임수를 쓰지 않고 항상 이기는 게임의 승자. 그것이 시간의 법이다.” 라고 읊었다. 어차피 우리는 시간에 끌려가는 영원한 패배자다.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고, 죽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본래 실체가 없는 구름이 사라지면 생명의 단초가 애초부터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외쳐 본들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성삼문의 죽음을 재촉하는 북소리는 비장하고 절절했지만, 우리는 시간의 북소리에 우울한 지경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일상의 삶은 언제나 밝고 낙관적인 무대가 있고 그 중심에는 종교와 문화, 헌신, 몰두 등등의 오묘한 망아지경(忘我之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멀리하고 싶은 시간의 북을 건강의 선반 위에 올려놓고, 목로주점이라도 가서 가을을 추상하며 목을 축이고, 신나는 노래방의 주인공이 되어 삶의 허무를 잊어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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