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너희들은 꽃망울금요수필
전주일보  |  webmaster@jjilbo.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9.13  15:01:25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백 금 종/수필가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는 커다란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수목이 울창하고 호수도 있어서 주민들이 쉼터와 운동하는 데 많이 이용한다. 나도 더위가 좀 수그러든 석양에 선선한 바람이 손짓하면 가끔 공원에 간다. 나 같은 늙은이부터 아장아장 걷는 아기까지 모여 생명의 환희가 넘친다.

주변에는 초, 중, 고등학교가 모여 있어 노을이 붉어가는 때면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우르르 밀려온다. 이리 뛰고 저리 내 달리는 그들은 푸른 초원을 질주하는 야생마다. 나도 저렇게 마구 뛰놀던 때가 있었지. 흘러가는 구름도 잡을 것 같던 때가…. 내게도 저렇게 꽃처럼 피던 시절이…. 내 기억의 아득한 곳에서 그리움과 아쉬움이 피어올라 찌부러진 눈가에 물기처럼 번진다.

 

상념에 젖어 있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찬찬히 보았다. 중中 고高 생은 말할 것 없고, 몸집이 큰 초등 여학생들까지 하나같이 립스틱을 발랐다. 중고생들은 입술화장만 아니라 어른처럼 꾸민 아이도 보였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왜 아이들이 립스틱을 발랐을까? 스타의 흉내를 내려는 짓일까? 아니면 조숙한 아이들이 벌써 여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일까?’ 부모들은 아이들이 화장하고 다니는 걸 알까? 선생님들은 어떤 신념을 가지고 그녀들을 가르치고 있을까? 내가 가르치던 시절의 순진무구했던 아이들과 저 아이들의 마음속은 얼마나 다를까?

내가 교직에 있었던 시절이라면 당장에 불러서 세수를 시키고 다시는 하지 말라고 야단을 쳤을 터이지만, 아이들이 하나같이 빨간 입술로 재잘거리는 모습에서 이미 다른 시대가 아닌가는 생각에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당신이 무언데 참견하느냐’고 대들면 망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들지 않는다 해도 ‘픽-’하고 웃으며 ‘너나 잘하세요.’ 하는 얼굴로 무시해버리면 더 비참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해 집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 생각할수록 그게 아니다. 그래도 한때 아이들을 가르친 교사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 마디라도 아이들에게 해 주었어야 했다’라는 자책이 가슴을 무겁게 눌러 답답했다. 나이테가 꽉 찼다고 꼭 쓸 만한 나무가 아니듯이 나이가 많다고 꼭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른 노릇을 하지 못하는 노인은 사회에 부담만 지우는 귀찮은 존재일 수도 있다.

자책감으로 복대기치는 심사를 달랠 겸 운동을 하러 아내와 함께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휘트니스 센터를 찾았다. 주민의 편의를 위해 여러 가지 운동기구와 단련 시설을 갖추어 놓았는데, 올 같은 더위에도 시원하게 운동을 즐길 수 있어 참 좋았다. 더더욱 좋은 것은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려 호흡하고 공감 할 수 있는 점이다.

더위를 이기며 한창 운동의 재미에 빠져 있을 때였다. 앳된 여학생 두 명이 사뿐 들어왔다. 공원에서 보았던 또래의 소녀들이다. 이 무더위에도 운동하겠다고 온 아이들이 기특하다고 생각하며 바라보았다. 함박꽃처럼 해맑은 아이들 입술에 빨간 립스틱이 선명하다. ‘저 아이들도 역시 립스틱을 발랐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리고 잠시 쉬는 동안, 나는 그 아이들에게 기어이 입을 열었다.

“애들아, 너희들은 꽃망울이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라는 듯, 생뚱맞은 말을 들은 아이들은 멀뚱히 나를 본다.

“예쁜 꽃망울들이 왜 립스틱을 발랐어?”

내 말뜻을 어렴풋이 알아들은 듯 아이들은 겸연쩍게 웃었다. 아마도 립스틱을 바른 것은 결코 잘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꽃망울은 아름답게 꽃피기 위해 단장을 하지 않거든. 몸부림을 치지도 않고 성급하게 굴지도 않으며 허세를 부리지도 않는단다. 뇌성벽력이 쳐도 놀라지 않고, 폭풍이 몰아쳐도 묵묵히 견디며 아름답게 꽃 피울 날만 기다린다. 영롱한 이슬이 맺히면 목을 축이고, 보슬비가 내리면 주저하지 않고 꽃잎을 내어주지.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아름답게 꽃 필 그날을 위해 온 마음으로 기다리는 거야.”

내 말을 다소곳이 듣고 있던 두 소녀가 일어서더니 문을 밀치고 슬그머니 밖으로 사라졌다. 아내는 괜한 소리를 한다고 곁눈질로 나무란다. 잠시 후, 가버린 줄 알았던 아이들이 보송보송한 맨얼굴로 돌아왔다. 건강미 넘치는 깨끗한 얼굴과 예쁜 입술이었다.

‘우리는 꽃망울입니다. 아직 다 피지 않은 꽃망울. 이제 요란 떨지 않고 예쁜 꽃으로 피어날 겁니다.’ 아이들은 몸짓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고마웠다. 늙은이의 말을 거부하지 않고 새겨들어준 일이 고마웠다.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은 아직도 입술을 빨갛게 칠하거나 화장하는 일이 좋은 일이 아니다. 는 것을 아는 예쁜 학생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주어서이다. 이 나라에 아직 기대할 만한 젊은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였다.

휘트니스 센터에서 아름다운 꽃망울들이 건강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도 그 아이들의 리듬에 맞춰 마무리 운동으로 몸을 풀었다. 뻑적지근했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날아갈 듯 상쾌하다.

항상 젊은이들의 경망함을 걱정하며 유행이나 좇는 저들이 과연 이 세상에 적응하며 잘살 것인지 미덥지 않던 마음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오늘 하루 빨간 립스틱 때문에 불편하던 마음이 그 두 여학생으로 모두 풀렸다. 오늘 밤 꿈은 퍽 고울 듯싶다.

 

 

 
전주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포토뉴스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55005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 198 (극동빌딩, 6층)  |  Tel 063-237-0095  |  Fax : 063-237-0091
등록번호 : 전라북도 가 00019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범규
Copyright © 2018 전주일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