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일에 돌아본 역사, 조선은 이렇게 멸망했다.
국치일에 돌아본 역사, 조선은 이렇게 멸망했다.
  • 전주일보
  • 승인 2018.09.0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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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 갑 제/ 언론인

1905년 11월 9일. 일본 천왕의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인천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목적은 단 하나. 조선을 삼키는 일이었다. 이토는 곧바로 고종황제에게 알현을 청하여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조선 보호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충격인 것은 한나라의 주권자이며 주인인 고종은 거부 의사는커녕 말 한마디로 이등의 요구를 수락하고 만다.

“우리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조약 어딘가에 흔적이라도 남겨 놓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날 고종이 한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경복궁을 나선 이토는 대한제국의 대신(장관)들을 하나하나 불러서 설득하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화여고 근처인 손탁 호텔에서였다. 일본 공사관으로도 불러 협박과 회유의 공작을 일삼았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불러서 조선병합의 당위성을 얘기하는데도 대신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거부 의사를 보인 인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성계가 나라를 열어 519년이나 된 조선, 그 후신인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국권을 빼앗기는 일인데도 “안됩니다.”라고 거부한 대신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사실 조선이 실질적으로 망한 때는 일본에 의해 민비가 시해당한 1894년 을미사변 이후 일본에 의해 추진된 개혁으로 1897년 대한제국이라고 국호를 바꾸고 이름만 고종황제가 되었던 때라고 볼 수 있다. 한 나라의 왕비를 죽인 세력이 계속 국정을 간섭한다는 건 이미 나라가 망했다는 증거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은 1905년 11월 17일이다. 그날 오후 3시. 일제의 강권에 따라 일본의 보호를 결정하는 어전회의가 열린다. 어전회의는 고종황제 앞에서 8명의 대신이 모여서 하는 공식적인 회의를 말한다. 3시간 넘게 회의가 진행됐다. 그러나 그 회의에서도 고종은 말 한마디 없이 대신들의 얘기만 듣고 있었다. 이날도 고종이 한 말은 단 한마디. “이등박문하고 협의해서 잘 처리하라” 그 말뿐이었다. 왕비를 죽인 그들이 두려웠을 것이다.

저녁 8시 어전회의를 한 결과를 가지고 이등박문과 대신들이 만난다. 어전회의가 끝났을 때 일본공사가 한규설 참정대신(국무총리격)한테 어전회의 결과를 묻는다. 한규설은 “어전회의에서 우리 8 대신은 모두 반대하기로 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일본공사는 어전회의하는 옆방에 있으면서 회의에서 어떤 것이 결정됐는지 이미 다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규설이 딴소리를 하니까 눈을 부라리며 심하게 질책했다. 총리가 일개 공사에게 야단맞았다.

그리고 같은 시각. 이토는 우리나라에 있던 일본군, 헌병부대를 대동하고 궁궐로 들어와 고종을 알현하자고 청한다. 하지만 고종은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나오지 않았다. 무서웠던 것일까? 고종이 나오지 않자 이토는 어전회의에 참석했던 대신들에게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먼저 참정대신에게 물었다. 한규설은 “반대합니다. 그런 조항을 가지고 조약을 체결할 수 없습니다”. 라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이토는 곧바로 헌병들에게 “한규설 대감을 잘 모셔라”고 지시해 퇴장시켜버린다. 민영기, 이하영도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반면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의견을 묻자 박제순은 “대세 상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며 찬성했다. 이완용은 한술 더 떠서 “일본이 우리나라 때문에 청나라, 러시아와 두 번 큰 전쟁을 일으켜 일본이 승리했는데, 우리 한국을 금방 먹을 줄 알았는데 제대로 먹지 않고 이렇게 협의적으로 처리하니 이 얼마나 신사다운가, 자구나 고쳤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권중현은 “제국의 황실, 황실의 안녕, 존엄을 유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제안했다. 이토는 만면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즉석에서 수락했다. 본래 이토는 서울에 올 때 4개의 조약만 가지고 왔었다. 그러나 권중현이 요구에 그 자리에서 조항을 하나 추가시켰다. 그 5조는 ‘일본군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한다.’ 였다. 을사늑약 조항이 5개로 늘어나게 된 사유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이 그 조약에 찬성하면서 결국 을사늑약은 체결되고 만다. 이들이 ‘을사5적’이다.

이렇게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었다. 을사오조약은 한나라의 주권을 일본이 행사하고 반식민지가 되는 조약이었건만 나라의 주인이었던 고종도, 대한제국을 유지 운영하는 정부 책임자들도 반대한다는 소리를 제대로 못하고 황실에 안녕과 존엄을 유지해달라고 하는 요구조건으로 조약에 서명해 버렸다. 그리고 5년 후 경술년인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왕을 비롯한 책임 있는 정부 당국자 모두가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해준다는 말에 나라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108년 전 8월 29일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절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참으로 뼈아프고 통절한 국치(國恥)의 날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다시한 번 생각하며 깊은 성찰을 통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뼈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마음을 다져야겠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50여 년 동안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독립정신도 기억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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