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구스러운 하루
면구스러운 하루
  • 전주일보
  • 승인 2018.08.3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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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몸을 움직이려면 우선 그 의도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한가하고 무료하다 해서 움직임이 무의식과 결부되어 아무런 결과도 없다면 사람 노릇이 아니다. 그러므로 등산은 가장 확실한 움직임의 중심이며, 의지의 표출이고, 목표가 분명하다.

나는 지난 일요일 가벼운 행장으로 모악산 등산에 나섰다. 들어선 곳이 연분암으로 오르는 등산로였다. 배낭에 김밥이며 과일 그리고 물통을 담고 등산의 이름을 빌린 산책으로 하루를 보내려는 심산으로 등산길에 들어섰다. 봄이 오는 분위기 때문인지 물소리가 졸졸 들려 생기가 넘쳤다. 지긋지긋한 겨울 추위가 이제 멀리 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상쾌하고 몸이 가뿐했다. 따뜻한 봄과 여름을 좋아하는 나는 이제부터 살판난 강아지처럼 우쭐한 기분으로 휘파람을 불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분암으로 오르는 길바닥에서 계단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한 노인이 내게 다가서더니 연분암 증축공사를 위한 건축자재를 운반하는데 협조를 해달라고 청했다. 운반할 것은 길이 8m 정도의 철제봉을 하나 들고 올라가 주면 고맙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주춤했다. 내가 할 수 있는지, 내가 운반해야 할 것인지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우선 철제봉을 들어보았다. 무게는 10kg이 조금 넘는 무게로 보였다. 어깨에 걸치니 그런대로 들고 갈 만했다. 좋은 일을 하는 셈 치고 들고 가겠다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50m 정도는 어깨에 걸치는 감각이 그다지 무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르막길은 가파르지 않았으나 울퉁불퉁한 바윗길의 사정을 감안하며 조심스럽게 오르는 일이 힘들었다. 어깨가 철제봉의 무게로 아프기 시작하며 조절이 쉽지 않아 나무에 부딪혔다. 앞서가는 젊은 남녀들이 자유롭게 재잘거리며 걸어가는 것을 보니 더욱 어깨가 아팠다. 경쾌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가볍게 산에 오르자는 조금 전의 생각이 무너진 듯 무거움이 더 느껴졌다. 누군가가 같이 동참하는 사람이 있다면 연대의식이 일어 그 무게가 약간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겠는데 아무도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

60대 후반의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무모하게 철부지 같은 영웅 심리로 혹은 낯간지러운 소명의식으로 철제봉의 십자가를 졌는지 후회의 심정이 슬쩍 치켜드는가 싶었다. 시작은 가벼웠으나 오를수록 무겁게 느껴지는 철제봉이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아 가며 메고 오르는 것이 힘들어서인지 땀방울이 등줄기에 송송 맺혔다. 지금 나의 처지가 ‘음식 같잖은 개떡 수제비에 입천장만 덴’ 격이었다. 평소 같으면 한달음에 올랐을 연분암까지 등산로에서 몇 번을 앉아 쉬었는지 모른다. 편백 숲에 들어서자 철제봉을 내던지고 의자에 앉아 땀을 식혔다. 이런 날씨에 맨몸이라면 연분암 뒤로 올라 능선에 설지라도 땀이 등에 겨우 밸 정도일 것이다.

일이란 즐거운 마음으로 진행하면 아무리 힘든 작업도 수월하게 할 수 있다. 반면에 가볍고 쉬운 일도 의욕이 없으면 힘들고 성과도 높지 않다. 싸움에서 군사들을 독려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승리했을 때는 최고의 전리품을 주고, 패배하면 죽는다는 공포심을 최대한 조장하는 데 있다.

다시 철제봉을 들어 올렸다. 조금 가벼워진 듯싶고 충분히 견딜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길은 한층 가파르고 나무에 철제봉이 이리저리 부딪쳤다. 힘이 모자랐던지 어깨에 멘 철제봉을 잡는 손마디가 무뎌졌다. 온몸에서 땀이 솟았다. 연분암이 눈에 보였다. 고지가 저긴데 여기서 포기할 수 없지, 스스로 다독이며 천천히 걸어 올랐다. 내가 그렇게 오르거나 말거나 앞뒤로 등산객들이 오르거나 내려가고 있었다. 둘이서 들고 오르면 수월할 텐데 아무도 같이 들고 가자며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같이 들고 가자고 할 처지도 아니었다. 목적지가 다가오자 없던 힘이 생겼는지 어깨 아픈 것도 잊고 열심히 걸어 올라갔다. 중간에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던 것을 제외하면 무난히 올라간 셈이다.

연분암 앞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철제봉을 갖고 오르면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라도 하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다. 조금 실망스러워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사실 그런 치사(致謝) 자체를 기대한 내 마음이 위선임을 깨달았다. 부질없는 생각을 부끄러워하며 철제봉을 내려놓으려는데, 대웅전 문이 열리며 하얀 머리의 보살님이 두 손을 모으고 내게 인사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머리는 희었지만, 미모의 그녀가 하는 인사로 인해 나의 힘들었던 기억이 봄눈 녹듯 사라지는 보답을 받았다. 철제봉을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의기양양하게 날아가듯 모악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어떤 봉사나 일거리도 힘들고 거친 과정을 겪지 않고는 성과를 보기 어렵다는 것을 삶의 현장에서 늘 보고 느낀다. 순수하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원봉사에 어떤 이기적 의도를 지녔다면 봉사활동을 스스로 폄훼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나도 그런 추레한 심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생각의 흐름이 있었기에 스스로가 면구스러운 하루였다. (2013. 2. 19.)

황정현/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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