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돼지
  • 전주일보
  • 승인 2018.08.29 15: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꿀꿀꿀' 앞서가는 재래종 돼지 한 마리를 머리 허연 촌부가 긴 회초리로 솜씨있게 몰아낸다. 옆으로는 참기름 가득 담긴 소주 대병을 머리에 이고 묘기를 부리듯 길을 나서는 아낙이 보이고 우리 집 바둑이도 신이 난 듯 아버지 자전거를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분주하다.

집에서 키우던 닭과 오리들은 발이 묶인 채 자전거에 실리고 마을 안쪽에 사는 정식이 아저씨의 커다란 리어카에는 배추가 한 가득이다.

고구마 순 등 푸성귀가 담긴 빨간 광주리는 총총걸음 아주머니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고 치맛자락 붙잡고 장터구경 나선 아이들의 종종 걸음도 쉴 틈이 없다.

그 시절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며 필요한 물품을 거래하는 시골 5일장에서 비중이 제법 큰 것은 바로 돼지였다.

어린 기억에 마을에서는 특별한 잔치가 아니라도 분기에 한두 번 돼지를 잡아 잔치가 되기도 했다.

새끼로 꼬아 건네진 뻘건 돼지고기 한덩이는 저녁 때 쯤엔 어머니의 솜씨가 더해져 불고기가 된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평상 옆 숯불 위로 맛있는 냄새가 오르면 장터에 다녀 온 바둑이도 자리를 잡고 한여름 더위 잊은 식사에 웃음바다가 된다.

집집마다 창고 공간이 있으면 우리를 만들어 돼지를 키우는 바람에 쾌쾌한 냄새가 끊이지 않았지만 돼지는 자식들을 키워내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잡식성인 돼지는 가성비도 좋았다. 소처럼 비싸지 않고 특별한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다 거래도 활발한 편이어서 현금성이 뛰어났다.

삼국사기 등 고서들을 보면 2천년 전부터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사육돼 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옛 서적을 빌리지 않더라도 오늘날 무당들의 큰 굿이나 동제(洞祭)를 보아도 돼지가 빠지지 않고 있고 사업을 앞둔 민가에서도 돼지머리를 두고 기원하는 의식이 이어지고 있다.

'돼지 멱따는 소리' 등 관련된 속담이나 '재물이나 행운으로 풀이되는 돼지꿈' 등 생활용어가 많은 것은 그만큼 돼지가 오랜 세월 우리 실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 컸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그렇지만 대량 생산의 부작용으로 돼지와 관련된 각종 전염병이 많아 농가 피해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전국의 축산 농가는 구제역으로 매년 홍역을 치르고 있다. 사람에 전염되는 병은 아니지만 가축피해가 커서 많은 소, 돼지들이 살 처분되고 수출 길도 막히는 피해를 입고 있다. 그런데 더 센 전염병이 나타났다. 이번엔 중국에서 치사율이 100%인 아프리카 돼지열병(African Swine Fever)이 번져 비상이 걸린 것이다.

1천㎞ 떨어진 중국의 랴오닝성에서 저장성까지 전염되는 데 20일 밖에 걸리지 않아 동남아시아 전역을 휩쓸어 버릴 것으로 외신은 우려하고 있다.

"제발 악귀는 물러가고 좋은 일 가득하라"고 제사라도 모셔야 할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