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은 연합군에 거저 얻은 선물이 아니다
8·15 해방은 연합군에 거저 얻은 선물이 아니다
  • 전주일보
  • 승인 2018.08.0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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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갑제/언론인

다시 또 8월, 눈부신 해방의 계절이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 국민은 해방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난 날, 막연히 하루 쉬는 광복절로만 인식하며 살아간다.

1945년 8월 15일은 분명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아 해방된 날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해방이 됐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또 누가 어떤 사람들이 민족 자결의 이념을 바탕으로 스스로 독립한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 자립을 위해 헌신하였는지를 공부하고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다.

조금은 안다 해도 막연하게 상식적인 선에서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얻어진 해방’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식도 국가나 민족을 위하여 몸 바쳐 일한, 몇 사람의 지사(志士) 이야기로 치부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민족 해방의 역사조차 정확히 모르는 채 오늘을 살아가는 세태. 이 슬픈 현대인들의 자화상은 해방 일흔세 돌에 돌아보는 참으로 가슴 시린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 1943년 12월 1일은 1895년 일본의 칼잡이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사건으로 촉발된 우리 민족의 독립항쟁역사상 가장 뜻깊은 날이다. 왜냐면 그날이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했던 역사적인 ‘카이로선언’이 발표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카이로 선언이란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 · 영국 · 중국 세 나라 정상들이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군사회의 갖고, 합의한 내용을 발표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카이로 선언의 끝부분에 한민족에게는 정말 ‘어두운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맑게 갠 운권청천(雲捲晴天)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자유로워지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정말이지 ‘꿈같은 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어떻게 어떤 방법을 동원했기에 당시에는 그 이름도 생소한 이집트 카이로에서, 그것도 일본과 전쟁 중인 미국과 영국, 중국의 정상들이 모여 전쟁의 종식과 사후처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보증할 수 있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극한 노력으로 얻어낸 성과였다. 당시 지구상의 민족 가운데 약 80%가 강대국의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유일하게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는 꿈같은 성과를 얻은 건 우리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그저 연합국이 우리를 생각하여 준 일방적 선물이 아니었다.

중국과 미국 등 모든 기록과 자료에 따르면 카이로회의에서 한국독립 문제를 제기한 것은 장개석이었고, 루스벨트가 이에 동의하여 실현됐다. 그리고 장개석을 움직인 사람들은 임시정부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었다.

임시정부는 1942년 미국을 중심으로 피점령지에 대한 국제공동관리 문제가 대두될 때부터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장개석이 루스벨트와 회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장개석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면담은 1943년 7월 26일 어렵게 이루어졌다. 주석 김구를 비롯하여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부사령 김원봉이 통역 안원생과 함께 장개석을 만났다.

이날 임시정부 요인들은 장개석에게 미국과 영국이 주장하는 국제공동관리에 대해 현혹되지 말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관철하여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였다. 장개석은 “한국의 완전 독립을 돕겠다”며 “어려움이 있겠지만 힘써 싸우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장개석은 그 ‘약속’을 지켰다. 장개석은 카이로회의에서 루스벨트에게 한국의 독립을 제의하여 관철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 패망 후에도 한국은 곧바로 독립되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했고, 각각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과 전쟁한 나라였고, 그 전리품으로 일본이 차지하고 있던 한반도를 점령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당연한 절차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일은 미국과 소련이 많은 비용과 인명을 희생시킨 대가로 한반도를 점령했지만, 이들은 3년 만에 한반도를 한국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바로 카이로선언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민족은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일제가 패망한 지 3년 만에 독립된 국가와 정부를 갖게 된 것이다. 한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어도, 카이로회의가 개최될 때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어도, 연합국이 독립을 보장해 주었을까?

다시 강조하지만 카이로선언과 8.15 해방은 우리 민족이 50년에 걸친 끈질긴 독립운동의 성과다. 연합군이 거저 준 선물이 아니다. 극우주의자들의 시각이긴 하지만 지금도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부정하고 폄훼하는 세력이 적지 않은 것은 너무도 가슴 아프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들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정하여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인하려 했다. 일제에 적극협조하고 충성한 자신과 조상들의 친일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광복 72년.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반민특위’라도 구성하고 싶다. 과연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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