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 헤는 밤
반딧불 헤는 밤
  • 전주일보
  • 승인 2018.07.12 16: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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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김 영 숙/수필가

물소리, 산새 소리, 개구리 소리, 반딧불이 등 섬진강 강가에는 여름 풍경이 가득하다. 그중에 으뜸은 우리에게 개똥벌레로 더 익숙한 반딧불이다. 그들은 나지막이 날아다니며 어디론가 열심히 반짝반짝 빛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사랑의 신호이고 그들만의 언어일 것이다. 바야흐로 그들의 짝짓기 철이 시작된 것이다. 어둠이 장막을 친 강가에서 그들의 신방이 여기저기에서 꾸려지는 중이다. 달빛은 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섬진강 가에도 있다. 얼핏 땅으로 내려앉은 소박한 달 조각 무리 같다.

반딧불이는 수컷과 암컷의 비율이 50:1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암컷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수컷은 누구보다 밝게 빛을 내며 온 힘을 다해 구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든 곤충이든 그 어디에도 쉬운 사랑은 없는 것 같다. 더 안타까운 것은 반딧불이는 보름 남짓 시한부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둘러 천생연분을 찾아야 하고 2세를 남겨야만 한다. 수컷이 짝을 찾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면 암컷은 짝짓기 후에 알을 낳고 그 짧은 생을 마감한다. 암수 모두 단 한 번의 사랑을 위해 생을 바치는 것이니 그 보다 더한 사랑이 있겠는가. 그래서 지켜보는 동안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정작 반딧불이는 그들만의 사랑 법으로 사랑하고, 2세를 남기고 삶을 마감한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만끽하는 향연의 장인데 말이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의 숭고한 혼사를 엿보기로 한다. 수컷은 속마음까지 불을 밝혀 꼬리를 흔들며 암컷을 향해 사랑을 고백한다. 암컷은 나뭇잎에 앉아 요염한 빛으로 적당하게 애를 태우다가 수컷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한밤의 혼사는 성사될 것이다. 그 시간 강가에는 방해꾼은 없다. 모두가 무언의 조력자일 뿐이다. 바람이 암컷의 옷자락을 살살 풀어주면 숲은 기꺼이 너른 강변을 신방으로 내주었다. 이에 질세라 강물은 재잘재잘 연주를 하고, 풀벌레는 강물의 연주에 맞춰 사랑의 세레나데로 분위기를 잡아준다. 반딧불이 또한, 수줍게 합방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화려했던 연둣빛 등불을 하나둘 끄기 시작한다. 그래서 한순간의 사랑을 위해 평생 지켜온 신비한 불빛마저 기꺼이 내놓는, 애절하고 숭고한 한밤의 정사가 경건할 수밖에 없다. 손가락에 침 묻혀서 문종이를 뚫어 신방을 엿보듯 조심스럽게 지켜보듯 숨죽이고 지켜보자니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어릴 적 수없이 봤던 반딧불이, 고작 놀이의 수단으로 썼던 반딧불이가 오늘 내게 숭고하고 애틋한 사랑으로 다시 다가왔다. 중년 세대라면 누구나 반딧불이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장난감이 따로 없던 시절이다. 흔하디흔했던 반딧불이의 꼬리를 떼어서 얼굴에 문지르면 형광이 나는 데 이것을 가지고 귀신 놀이를 했다. 피지 않은 호박꽃 속에 넣어서 호롱불이라며 들고 다니며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때는 너무 많아서 귀한 줄도 몰랐다. 반딧불을 쫓아 밤이슬에 옷 젖는 줄도 모르고 풀벌레 소리 요란한 개울가를 쏘다니던 풍경은 무한한 낭만과 추억을 기억할 구실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빛을 밝혀 위안을 주고 길을 찾게 하는 어둠 속 길잡이였다.

반딧불이는 고향의 서정이자, 아련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고 1급수 주변에서만 볼 수 있는 건강한 생태계를 상징하는 환경 지표종이다. 예전에는 어둑어둑 어둠이 깔리면 하늘의 별만큼이나 반짝거렸던 반딧불이다. 아름다운 은하수 아래의 밤, 반딧불이가 날아도 관심 갖는 아이들도 별로 없다. 이이들은 휴대폰으로 게임하는 데 더 익숙해졌고 어른들은 개발이라는 눈앞의 이익에 정신 팔려 그들의 보금자리를 조금씩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반딧불이가 사라져 가는 만큼 우리는 가슴은 삭막해지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도 줄고 있다. 그들의 영역을 빼앗고 몰아내는 만큼 우리의 가슴은 공허해진다. 우리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자리가 바로 자연이라는 것을 망각한 채 말이다. 인간이 이기심을 버리지 않는 한, 어쩌면 그들을 보기 위해서는 소설 속을 뒤지거나 곤충도감에서 정보를 얻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반딧불이는 청정지역의 상징이 되었다. 반딧불이가 무리지어 산다는 것은 그만큼 물이 맑다는 것이다. 점점 사라져가는 반딧불을 위해 무주군 일대에서는 반딧불이와 그 먹이 서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런 귀한 반딧불이를 어스름한 저녁 산책삼아 나선 동네 강가에서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행복한 일던가.

사랑이 식어가고 삭막한 생활에 심신이 서서히 지쳐갈 때 쯤 강가에 한번 나가 볼 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숭고한 사랑 법에 고개를 끄덕여보자. 더하여 반딧불이 같은 작은 빛으로 세상을 밝히고자 애쓰는 삶을 생각하자. 반딧불이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바로 소박한 불빛 때문인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그 소박함으로 여기저기 우리의 손이 필요한 곳에 불 밝혀줄 사람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더 따뜻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것이 좋다. 언제든 섬진강 변에 나가면 *부서진 달 조각을 원 없이 주울 수 있는 반딧불 헤는 밤을 꿈꿀 수 있어 좋다.

* 윤동주의 시 <반딧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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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18-11-01 13:01:27
추억 돋는 글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