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쟁(擊錚)
격쟁(擊錚)
  • 전주일보
  • 승인 2018.06.1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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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시대에 백성들이 억울하거나 원통한 일을 당하면 징이나 꽹과리, 북 등을 쳐댔다. 임금이 거둥하는 길목이나 특정 장소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고자 함이었다. 이른바 '격쟁(擊錚)'이었다. 달리는 '명쟁(鳴錚)', '명금(鳴金)'이라고도 했다.

조선 전기의 '신문고(申聞鼓)'를 뒤 이은 것이다. 16세기 중종과 명종 연간에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수단과 방법으로 정착됐다. 신문고는 원래 하층민의 여론을 위에 전달(상달·上達)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제도였다. 그러나 한양사는 문무관원들의 청원(請願)·상소(上訴) 도구로 변질돼 하층민과 지방 백성들에게 별다른 효용성이 없게 됐다. 그나마도 호소할 수 있는 내용에 제한이 많아 민의(民意) 상달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더욱이 일정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방백들의 권한을 확립한다며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 시행되면서 효용가치는 더욱 낮아졌다. 이를 대체하자고 생겨난 제도가 격쟁이요, 상언(上言)이었다.

격쟁은 형태별로 궐내(闕內)격쟁, 위내(衛內)격쟁, 위외(衛外)격쟁으로 구분된다. 직접 궐내로 찾아들어가 임금에게 호소하는게 궐내격쟁이고, 위내격쟁·위외격쟁은 임금이 백성들의 거리로 거둥에 나섰을 때 모양을 드러냈다.

격쟁은 합법적인 호소 수단으로 횟수에 제한없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몇번이고 반복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소한 문제 등과 관련해 격쟁이 남발되면서 또 다른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격쟁 내용에 제한을 두는가 하면 과도한 격쟁인을 처벌하기도 했다.

형벌이 자신에게 미치는 사안이나 부자(父子) 관계를 밝히는 일, 적첩(嫡妾)이나 양천(良賤)을 가리는 일 등은 '사건사(四件事)'라 해서 격쟁의 내용으로 할 수 없게 제한을 받았다. 만약 격쟁의 내용이 무고(誣告)로 밝혀지면 곤장이나 유배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상고법원 도입과 관련해 법원행정처가 박근혜의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세상이 떠들썩 하다.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사법부의 근간이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사법농단'에 따른 '사법불신'의 정도가 깊어지면서다. 양 전 대법원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강변했지만 의혹은 구르는 눈덩어리처럼 커지는 모양새다.

얼마전 한 방송사의 앵커가 "양 전 대법원장의 해명을 믿지못해 거리로 나선 시민들 사이로 꽹과리, 징, 북 등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고 브리핑을 했다. 근·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조직원리이자 권력분립(삼권분립-입법·사법·행정)의 원칙이 실종된 상황이다. 법치국가에 살면서도 행정권과 사법권이 분리되지 않은 왕조시대의 백성들처럼 시민들은 그렇게 격쟁 행위라도 하고 나서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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