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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에 절은 사탕금요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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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07  15: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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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숙 /수필가

“내일이 어머니 기일이라 산소에 다녀오려고요,”

동생의 전화다. 어머니는 13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먼저 내 손을 보게 된다. 내 왼손 손가락 세 개는 세 마디가 없다. 여섯 살 때 소꿉놀이를 하다 작두에 잘렸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다쳤던 아픔보다 무서웠던 기억이 앞선다. 같이 놀던 나보다 두세 살 많은 동네 언니는 사고가 나자 덜컥 겁이 났는지 나를 곧바로 어른들께 데려가지 못하고 자기네 집 아랫목에 눕혔다.

결국, 나는 과다출혈과 심한 통증으로 실신하듯 잠이 들었다. 부모님은 몇 시간 지난 후에야 그런 나를 발견하셨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여서 손가락을 접합할 수가 없다고 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손가락을 붙일 방법만을 알려달라며 의사에게 매달려 애원하셨던 부모님은 끝내 세 손가락 잃은 어린 딸을 부둥켜안고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꼬박 한 달가량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녀야 했다. 버스조차 안 들어오는 강원도 첩첩산중 두메산골, 살을 에는 추위에도 부모님은 번갈아가며 나를 업고 왕복 이십 리 길을 걸어서 다니셨다. 그 시절엔 왜 그리 추웠던지, 눈은 또 왜 그리 많이 내렸는지. 당신들 힘든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다친 손 얼어 터질세라 ‘호 호’ 불어가며 녹여주시던 어머니의 그 입김은 아직도 따뜻하게 가슴속에 남아 내 그리움이 솟구칠 때마다 아린 가슴을 어루만져준다.
나는 자라면서 “차라리 내 손가락을 네게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하시며 내 손을 볼 때마다 늘 안타까워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싫어서 어머니 앞에서는 왼손을 제대로 펴 보이지 않았다. 손을 마주잡아 본 기억도 별로 없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시며 속으로 더 아픔을 삭였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일 년 반 남짓 중환자실에 누워계시다 돌아가셨다. 무보험, 무면허 운전자의 차량에 사고를 당했다. 그 투병시간 내내 중환자실에서 아버지 간병을 어머니 혼자 도맡아 하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안일이지만, 식구들 몰래 같은 병실 환자의 간병까지 맡아 병원비에 보태셨다. 보호자 대기실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나는 여기가 편하다.”는 그 말씀만 믿고 미련한 자식들은 따뜻한 방에서 다리 펴고 잠을 잤다. 하지만, 안다. 넉넉지 못한 자식들 형편을 생각해서 그러셨다는 것을.

그 후에도 어머니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무릎관절염과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식당일을 계속하셨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몸만 아프고 잡념만 생겨. 그러니 운동 삼아 쉬엄쉬엄하련다.” 하셨지만, 그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 모든 희생이 자식 사랑이었음을 어찌 모를까? 언젠가 “박정옥 여사 계십니까?”하고 장난삼아 전화를 드렸더니 “그런 사람 없는데요.” 하며 끊어버리시는 게 아닌가. 당신의 이름 석 자는 까맣게 잊으시고 오롯이 다섯 남매의 어머니로만 평생을 사신 우리 어머니! 전화비 많이 나온다며 늘 먼저 전화를 걸어주셨고, 내가 전화 드린 날에는 “나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하며 일방적으로 끊으셨다.

그런 어머니가 사고 나기 며칠 전부터 부쩍 전화가 잦았었다.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언제 날 잡아 한번 다녀가거라.”

“바쁜 일 끝나면요.”

건성으로 대답하자 “알았다”며 끊던 전화기 속에서 어머니의 짙은 아쉬움과 그리움을 거니채면서도 이런저런 구실로 찾아뵙지 않았다. 그 일이 두고두고 가슴을 후벼 판다. 사고 후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아직 죽으면 안 된다. 내 새끼들 잘사는 걸 보고 가야 한다.” 그 말씀이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곁에 어머니를 모셔드리고 집에 와서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주머니마다 사탕이 몇 개씩 들어있었다. 혈당이 떨어질 때를 대비한 비상약이다. 언제 넣은 것인지 반쯤 녹아 옷에 착 달라붙은 것도 있었다. 어머니의 땀에 절어 녹은 사탕이다. 얼룩덜룩 물 든 그 옷에서는 고단했던 어머니의 일상(日常)과 자나 깨나 조바심하시던 자식사랑이 보였다. 울컥 눈물이 났다. 늘 그 자리에서 천 년 만 년 버팀목으로 살아계실 것만 같던 어머니가 그렇게 떠나가셨다.

동생과 통화를 끝내고 어머니 생각이 사무쳐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내 결혼사진이다. 혼사를 앞두고 애물단지 딸 때문에 무던히도 속을 태우셨다. 저 손으로 살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시댁에서 기죽어 살지는 않을지, 걱정을 놓지 못하셨다.

“저희 사랑하며 잘 살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어머니 손을 잡는 남편 손위에 내 손을 포개어 꼭 잡아주시던 그 따뜻한 손길이 바로 엊그제인 듯 그립다.

어머니! 손톱을 깎아드리고, 등을 밀어 드리고 몇 번이나 어깨를 주물러드렸던가? 값비싼 선물이나 해외여행을 보내드리는 게 효도인 줄 알았는데 두 아이의 어미가 되고 나서야 철이든 딸은 어버이가 진정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아렴풋하게 짐작한다.

되돌릴 수 있는 세월이라면 내 불편한 손일지라도 주무르고 어루만져 드리고, 이렇게 오순도순 잘사는 모습을 보여드려, 옹이 진 미욱한 여식의 한을 풀 수 있으련만.사진 속 어머니의 미소를 보며 나도 가만히 그 미소를 따라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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