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찾기
이산가족찾기
  • 전주일보
  • 승인 2018.05.2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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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으로 된 벽면에 촘촘히 붙은 대자보. 더 이상 공간이 없다. 두꺼운 종이에 큼지막하게 적은 뒤 비닐로 두 번을 감싸 접지도 못한 채 조심히 들고 왔는데. 친구 어깨 위에 서서 벽을 붙잡고 있다가 다시 한번 점프하기를 수차례, 대자보 자리를 겨우 잡았다. 1983년 여름 여의도 KBS 주변 이야기다.

6월 30일 아침방송 '스튜디오 830'에 전국은 들썩였고 전 세계가 주목했다. 폭발적인 반응에 이후 5일 동안 '이산가족찾기' 릴레이 생방송을 한다. 시청률은 78%.

몇몇 가족이 만나는 모습을 보자 많은 이산가족들이 한꺼번에 출연신청을 했고 결국 방송국은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한 채 그해 11월 14일까지 138일 동안 '이산가족찾기'를 했다. 만난 가족들은 4천 가구 정도. 이후 프로그램은 해외동포 쪽으로 확대, 사할린 동포와 국내 가족이 상봉하는 극적인 모습이 방영되기도 했다.

평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난 아버지 마음도 그분들과 같았다.형제들이 많았던 만큼 그 중 한분이라도 내려오셨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다. 방송 후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식사는 물론 잠도 미룬 채 TV시청에 매달리던 촌부는 지치기 시작했고 만남의 기대는 실망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그 무렵 사람들은 방송국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북한 지역별 모임을 결성해 정보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만남의 광장이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평양을 찾아 겨우 같은 마을에 살았던 분 연락처를 얻어 주황색 공중전화기에 매달렸다. 전형적인 북한 사투리를 쓰는 마을 어른은 다행히 할아버지를 알고 계셨고 아버지의 큰형님, 큰아버지 모습도 기억하셨다.


"음 너무 복잡했어. 1·4후퇴 때, 어머니(할머니)가 편찮으셨고, 그래서 내려오다 포기하고 식구들 모두 다시 올라갔어."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전할 수도, 전하지 않을 수도 없어 며칠을 고민하다 아버지께 말씀드렸지만 당신은 여전히 TV를 보시며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해 4개월 보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해, 기력이 다한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등지시고 말았다.

"생존해 있는 친족 이산가족은 5만 7천여 명, 60% 이상이 80대 이상입니다. 2017년에만 3천 8백 명의 이산가족이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북 공동으로 20년 동안 진행해 온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모두 20차례. 한번에 100 여 명씩 만나는 전시성 행사에 뽑히기도 힘든 데다 기회마저 너무 적다. "저희 이산가족들은 솔직한 얘기로 상봉이라든가 이런 것이 논의된다고 보지 않고, 만일 논의가 된다면 생사 확인 먼저하고, 편지나 엽서라도 보내주고. 이런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대한적십자사와 이북5도민대표 등의 말이다. 죽기 전에 가족 한번 만나게 해주고 소식이라도 알 수 있게 해주는 건 당연하고 시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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