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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금요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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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03  13: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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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숙/수필가

한적한 벤치에 앉아 홀짝홀짝 캔 커피를 마신다. 참 처량하다. 혼자 산책을 나선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거늘, 오늘따라 왜 느낌이 이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이와 싸웠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의 마음속에 스며 있어 언제 어디서나 하나로 지낸다. 둘이 사이가 좋을 때는 홀로 다녀도 서로 늘 마음속을 차지하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 절대로 처량한 법이 없었다. 그러나 싸우고 나면 마음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밀쳐 내버린다. 그래서 화해할 때까지 나 혼자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홀로 산책을 해도, 차를 마셔도 늘 처량한 느낌이 등 뒤를 졸졸 따라붙는다.

우리 부부는 사랑을 주춧돌삼아 20년째 무텅이 땅을 일구듯 열심히 살았다. 잘 알수록 상대방의 다른 점을 인정하고 보듬으며 살아야 하는데, 내 기준으로 상대를 재단하여 서로 다 안다고 우기며 다툰다. 그래서 가끔 살아온 세월의 진폭으로 사랑을 보장받으려한다. 별것도 아닌 일에 날을 세우고 서로 뜨개질하며 으르렁거리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참 많이 다퉜던 것 같다.

세월은 부부들에게 함께 해 온 둘의 사이에서 날 선 각을 무디게 하는 풍화작용을 한다는데, 우리 부부는 아직도 날을 세운 채 머리를 꼿꼿하게 버티고 있는 돌멩이 같다. 함께 한 세월을 본다면 둘은 분명히 깎이고 닳아 강의 중류 어디쯤에서 둥글둥글한 돌멩이 같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그 기대만큼은 아직 버릴 수 없다. 이웃에 사는 호호백발 부부의 산책을 날마다 지켜보며 세월의 풍화작용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보기에는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부부다. 허리 굽고 키 작은 할머니와 연세에 비교하면 허리도 꼿꼿하고 아주 훤칠하게 잘 생긴 할아버지다. 하지만, 우리 아파트단지 내에서는 잉꼬부부로 소문이 자자하다. 두 분은 늘 두 손을 꼭 잡고 산책한다. 그렇다고 매일 다정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걷기도 하지만, 어느 날은 옥신각신 다투기도 한다. 참 신기한 것은 입으로는 쉼 없이 다투지만, 언제나 두 손은 꼭 잡고 걷는다.

할아버지는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오토바이를 젊은이 못지않게 잘 탄다. 할머니더러 “야 !타!”하면, 할머니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케이! 밴츠 탄 야타족도 안 부럽당게” 하신다. 60년 세월을 함께 살면서 어떻게 순탄한 평지만 걸을 수 있었을까? 숨 가쁘게 언덕길을 오르기도 하고 사나운 폭풍우도 만났으리라. 그러나 그럴 때마다 주인이야 싸우든지 말든지 꼭 잡은 두 손은 열심히 진실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중재했던 모양이다.

긴 세월 고단한 인생길에서 동반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이 바로 함께 늙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동행이란 부귀영화를 보고 정신없이 쫓아가는 덧없는 길이 아니라 함께 세상을 느끼며 묵묵히 행복을 찾아가는 동행 길이다.

행복은 반드시 타워팰리스 40 몇 층에 살아야 얻는 게 아니다. 중형차 뒷자리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번쩍이며 도도하게 세상을 봐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소나기를 피해 들어간 어느 작은 간이역에서 마시는 자판기 커피 한 잔 속에 녹아있을 수도 있다. 아니 꽉 막힌 도로에서 가다 서기를 반복하다가 펑 뚫려 달리며 차창 너머로 마시는 시원한 아침 공기 속에 묻어있을 수도 있겠다. 또는 온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귀가했는데 아침에 쌓아놓고 출근한 설거지거리를 누군가가 대신해 놓았을 때 쏟아내는 감동 속에 묻어 있을 수도 있고 오순도순 둘러앉은 저녁식탁 위에 몽실몽실 숨어 있을 수도 있다. 행복은 그렇게 머리카락 같은 미세한 기억이라도 추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소한 일상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아 행복한 일이 이론적으로는 참 쉽게 정리되지만, 막상 내 삶으로 옮겨왔을 때는 그리 만만하지 않다. 가끔 나는 남편에게 “대체 날 사랑하기는 하는 거냐?”라고 투정부린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느냐?”라며 면박을 주기 일쑤다. 그래도 나는 밋밋하고 고된 인생길에서 가끔은 “사랑한다.” “많이 힘들지?” 같은 삶의 양념은 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인생길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는 사랑의 묘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묘약을 얻기 위해 투정부리거나 싸우기도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비록 사랑한다는 표현마저 인색하고, 싸우면 이겨야 하는 오기를 앞세우고, 외출할 때 손잡고 걸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없지만, 지지고 볶으며 살다 보면 이웃 노부부(老夫婦)처럼 사랑의 연륜을 곧게 쌓아 “당신 만나 참 행복했어요.”라며 노을처럼 목숨이 지는 날, 고백할 수 있는 동행 길이 다져지리라.

마지막 커피 한 방울까지 탁탁 털어 마시고 총총걸음 치며 ‘그대와 나’란 자작시를 읊어본다.

오래전 강에서 주워온 몽돌을 만지니/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난다./서로에 부대끼며 견뎌온 추억이 /깊기 때문이다./그대와 나/ 날선 돌맹이처럼/감정의 날 세우며 살지만/세월 아래 끼워놓은 사랑이라는 주춧돌/ 씻고 다듬으며 세월의 강 흐르다보면/시나브로 동글동글 닮아가기는 하겠지/내 인생의 몽돌 하나 그대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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