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는 기억한다
유전자는 기억한다
  • 전주일보
  • 승인 2018.04.2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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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불임인 주인공은 아내가 낳은 아들에게서 자신과 닮은 구석을 찾지 못한다. 자신의 불임을 밝히지 못한 주인공은 아들이 증조부를 닮았다고 변명하고, 아들의 가운데 발가락이 자기와 같이 긴 것을 보고 발가락이 닮았다고 말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만든다.


우리는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는 부모의 유전자가 유전되기 때문인데, 사람은 약 2만 여개의 유전자를 아들, 딸에게 전달한다. 이렇게 많은 유전자가 기능을 하려면 mRNA로 발현되어야 하는데, 유전자의 종류마다 나이, 성별, 환경, 영양상태, 조직별 등 발현되는 정도가 다르다. 또한 정상적인 세포와 암세포 간에도 mRNA로 발현되는 유전자의 종류도 현저하게 차이가 있다.


유전자 침묵(gene silencing)은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다양한 방법 중에 대표적인 기작이다. 일명 후성유전으로도 불리는 유전자 침묵은 A, T, G, C 4종류의 알파벳으로 구성된 DNA의 알파벳 서열을 바꾸지 않는다. 그 대신에 DNA의 DNA의 알파벳 중에서 C에 메틸기를 붙이거나, DNA가 감싸고 있는 히스톤 단백질에서 메틸기, 아세틸기 등의 화학적 작용기를 바꾸어 유전자의 발현 혹은 활동을 조절한다.


‘네덜란드 기근’은 유전자 침묵 혹은 후성유전의 중요성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1945년 나치군은 네덜란드 서부지역을 둘러싸고 모든 식량과 연료의 배급을 통제하였다. 그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6개월 동안 하루에 800 kcal 미만의 저열량으로 생명을 유지해야만 했다. 유명인으로는 배우 오드리 햅번 역시 청소년기에 네덜란드 기근을 겪어서 영양실조로 고생하였다. 네덜란드는 의료 보건 기록을 잘 관리하여 이 시기의 국민들의 건강상태를 꾸준히 추적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 어머니의 자궁에 있었던 태아들을 분석한 결과,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다양한 성인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 태아기의 경험이 신체에 기억되어 향후 수십 년간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되었다.


또 다른 예로 일란성 쌍둥이는 부모에게서 같은 유전자가 유전된다. 그들은 먹는 음식과 환경의 차이에 따라 성인이 된 후 서로 다른 질병에 걸린 것으로 보고되었고, 이들을 분석한 결과 DNA의 메틸화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홀로코스트(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 생존자의 자녀들을 분석한 결과 특정 유전자의 C 메틸화와 mRNA의 발현에 차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에 대한 대응 능력에도 차이가 있었다. 이와 같이 유전자 침묵을 통하여 과거의 경험이 후대에도 기억되어 전달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와 같은 사례는 극단적인 환경을 경험한 후에도 생존할 수 있도록 우리 인체와 유전자가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정자와 난자가 만나 형성된 수정란은 태아로 발달하면서 후성유전자를 재설계한 후 태어난다. 즉, 후성유전은 과거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가역적이어서 한때 기억했던 것을 지우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매우 정교하게 조절된다. 따라서 엄마가 임신하고 양육하면서 태아와 아이에게 최고의 것을 주지 못하여 미안하고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건강한 먹거리를 섭취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건강한 후성유전자를 기억하게 하는 방법이다.


/농촌진흥청 농업연구사 원소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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