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 꽃 물든 순희
자운영 꽃 물든 순희
  • 전주일보
  • 승인 2018.04.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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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금 종/ 수필가

봄에는 여러 가지 꽃이 피고 진다. 그 많은 봄꽃 중에도 나의 마음을 애잔하게 하는 꽃이 있다. 지금은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없으나, 내 어린 시절에 이맘 때 쯤 이면 들판에 지천으로 피었다. 늦은 봄 논갈이가 시작되기 전, 꽃 바다를 이루어 너울너울 파도쳤다. 자운영 꽃이다.

나의 유년의 시절에는 참 곤궁했다. 봄에는 보리 고개가 있어 배 고품에 시달리곤 했다. 한 두 끼니 거르는 것은 예사였고, 가끔은 맹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산이나 들로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송기松肌를 벗겨오거나, 길가에서 질경이를 캐고, 논에서 둑새풀 씨앗을 훑어왔다. 자운영 꽃잎을 따오기도 했다. 그렇게 걷어온 송기는 쌀과 함께 떡을 빚고 질경이는 죽을 쑤고, 둑새풀 씨는 볶아서 간식으로 먹었다. 자운영 꽃잎으로는 전을 붙이기도 했다. 어렵사리 얻어온 먹을거리지만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정을 주고받았다.

어머니는 봄철이 오면 바가지를 들고 들로 나섰다. 둑새풀 씨앗을 털고 자운영 꽃잎도 땄다. 한나절 내내 털어도 겨우 한 줌 될까 말까하는 그 씨앗을 볶아서 맷돌로 갈아 먹기도 했다. 거칠고 껄껄해서 목안으로 넘기기 어려웠지만 참고 먹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주린 배를 채워야 하기에.

둑새풀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자운영 꽃도 한창 피어 꽃 바다를 이루었다. 어머니가 자운영 꽃잎을 따는 사이, 카펫처럼 깔려 있는 자운영 꽃밭은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꽃밭에 벌렁 누워 마구 뒹굴고 헤엄치기도 하고,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저 구름이 가는 곳은 배가 고프지 않은 곳일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 보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그곳은 나비들의 천국이 된다. 노랑나비, 흰줄나비, 표범나비, 호랑나비 등 온갖 나비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모여든다. 이 꽃에 앉았다가 저 꽃에도 앉으며 노닐었다. 나비는 꿀을 찾아 날고, 호기심이 발동한 아이가 그 나비를 쫓으면 자운영 꽃밭엔 긴장감이 감돈다.

그러다가 제 풀에 지친 아이가 벌러덩 누워버리면 다시 평화가 돌아오고 나비도 한가로이 꿀 따기에 나선다. 그때 먼발치에서 하얀 저고리에 연분홍 치마를 입고 꽃잎을 따는 어머니 역시 자운영 꽃밭을 누비는 영락없는 나비였다. 나도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자운영 꽃밭을 훨훨 날수 있으면…… 자운영 꽃밭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하고 아늑한 요람이요, 때 묻지 않은 영혼이 마음껏 꿈을 꾸던 연분홍빛 바다였다.

자운영 밭에서 제일 신나는 일은 자운영 꽃반지를 만드는 일이다. 여러 개를 만들어서 집에 가져오면 동생에게, 옆집 순희도 주곤 했다. 꽃반지를 받아 든 순희의 얼굴에 자운영 꽃물이 들었다. 순희 얼굴에 드는 꽃물에 정신을 빼앗긴 나는 더 열심히 꽃반지를 만들어 주었다. 순순히 받는 때도 있었지만 심사가 뒤틀린 때는 꽃반지를 내동댕이쳤다. 얄미운 생각이 들었지만, 귀여운 얼굴에 드는 꽃물을 생각하여 다시 주워 그 아이 앞에 획 던져 주곤 냅다 달려오기도 했다. 순희가 그걸 주워서 손에 끼었을까 궁금한 생각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향기로운 봄꽃이 앞 다투어 피었다 진다. 꽃을 보고 있노라니 그 옛날 마른논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자운영 꽃밭으로 마음이 달려간다. 자운영 꽃을 생각하면 둑새풀 씨앗을 볶아먹으며 가난을 이겨냈던 시절, 살가운 이웃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작은 것 한 톨이라도 나누어 주린 배를 채웠던 그 뭉클한 정이 그리워진다. 그런 가운데서 아련하게 꽃반지를 끼고 얼굴이 발그레하던 옆집 순희의 예쁘장한 모습이 내 기억의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 된다.

한 시대가 바람처럼 지났다. 그토록 배고팠던 시절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나를 포근하게 감싸 주었던 자운영 꽃도 쉽게 볼 수 없다. 자운영, 가련한 전설을 안고 있는 꽃이며, 배고팠던 추억을 올올이 엮어준 아픈 기억의 꽃인 줄 만 알았다. 알고 보니 살아서는 화전이나 녹차 등 먹을거리로 보시하고, 죽어서는 녹비로 대지를 살찌게 하는 식물이라고 한다. 꽃의 생명력은 뭐니 뭐니 해도 아름다움이다. 거기에 더하여 향기마저 짙다면 더할 나위 없으려니 싶다. 그런데 자운영은 땅을 비옥하게 하는 기능까지 있으니 아련한 정과 함께 소중함까지도 느껴진다. 시간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여 있는 지금, 자운영 꽃이 베푸는 그 상생을 실천하면 내 인생도 조금은 연분홍빛 향기가 나지 않겠는가?

그 옛날 순진무구하게 뛰어 놀았던 들판 앞에 서 있다가 잠시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었다. 문득 정신을 추슬러 사방을 둘러본다. 추수 후 남긴 그루터기 사이로 보드레한 봄바람이 스쳐 간다. 매서운 겨울을 이겨낸 대지 곳곳에서 새 생명이 움트느라 한창 바쁠 것이다. 다시 들판에는 농부의 간절한 소망과 땀이 흘러넘칠 것이고 뜨거운 태양이 식을 때쯤이면 수확의 기쁨이 가득하겠지.

봄은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계절이면서 가을의 기대에 마음을 부풀게 하는 소망의 계절이다. 이 멋진 봄들에서 분홍빛 가득한 자운영을 볼 수 있었다면 퍽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분홍빛 자운영 밭에 내가 준 꽃반지를 낀 순희가 발그레 미소를 지은 모습이 그리움처럼 스쳐갔다.

 

백금종/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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