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량 장군
최희량 장군
  • 전주일보
  • 승인 2018.04.0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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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활약한 최희량 장군(1560~1651)은 전라도 나주목 초동리(현재 다시면 가흥리)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용모와 큰 체구에 글 읽기를 좋아했다. 부친의 뜻에 따라 무예를 익히다 34세(1594)에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무과에 급제한 뒤 충청 수사로 있던 장인 이계정(李繼鄭)을 돕도록 천거받아 선전관에 임명됐다. 임란 당시(1592)에는 상중(喪中)이어서 나아가 싸우지 못했지만 정유재란 때 전란의 최전선이었던 흥양(고흥)현감을 맡아 왜군의 파상 공격을 치밀하게 막아냈다. 

순천 왜성에 근거를 두고 남해안 서부지역으로 진출하려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에 맞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그의 관할 지역에서 전투선과 무기를 제작해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데도 기여한 바가 컸다. 여러 차례의 전공과 그같은 역할에 당시 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격찬을 했을 정도였다. 충무공 휘하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운 그였으나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충무공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전란 뒤 논공(1604)에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병자호란 때는 나이가 많아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내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케 하였다. 대를 이어 나라에 충성을 다한 셈이다. 이런 공들을 인정받아 1774년(영조 50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800년(정조 24년) 나주 향인들이 지은 사당에 충무공과 함께 배향됐다. 사후에 시호로 무숙(武肅)공이 내려졌다.

일옹문집(逸翁文集·2권1책)을 남긴 그가 충무공에게 올린 보고서 <임란첩보 서목·보물 제660호>에는 7년간의 전란에 휘말렸던 호남사람들의 생활상과 의병으로 나섰던 호남의 정의감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임란첩보 서목에는 흥양 일대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 현황을 비롯해 전투에서 얻은 적군의 수급(머리)과 새로 만든 무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충무공이 붓으로 쓴 글씨와 수결(서명)한 관련 자료들이 들어있다. 또한 화포로 쓰인 현자총통(보물 885호·진주 박물관 소장)과 포탄의 일종인 비격진천뢰, <수군조련도> 등도 소개해 놓았다. 2척의 거북선을 앞세워 깃발을 내건 판옥선들이 군진을 형성, 해상에서 연합훈련을 하는 수군 조련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나주·고흥 등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맞서고 전란에 휘말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던 참담한 생활상도 담았다. 

국립나주박물관이 장군의 기록 등을 중심으로 지난달 27일부터 5월20일까지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박물관 1층에서 '호남의 임진왜란, 그 승리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특별전을 열고 있다. 

장군이 남긴 기록을 통해 나라의 위기에 분연히 떨쳐 일어선 호남사람들의 의기를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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