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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사랑한 제자, 제자가 사랑했던 茶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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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07  18:4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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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8월 정약용은 장장 18년간의 유배가 풀려 강진 다산초당을 떠나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그때 나이 57세였다. 40대의 열정과 50대의 원숙을 강진에 다 묻고 초로의 늙은이가 돼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밟은 것이다.

다산은 귀양살이 18년 동안 240여 권의 경학연구서를 저술했으면서도 고향에 돌아온 날부터 바로 경세학 연구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경세학의 첫 번째 저서가 바로 ‘경세유표’. 그는 법과 제도를 제대로 개혁해야만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여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법을 고치지 못하고 제도를 변경하지 못하는 것은 통치세력의 어짐(仁)과 어리석음에 이유가 있지, 하늘의 이치가 원래부터 고치거나 변경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현명한 통치세력이 등장해야만 좋은 법과 제도로 개혁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의 안목과 학식을 지금 이 시대에서도 새삼 느낄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학자인 다산은 그의 학식을 제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참 스승이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과 황상(黃裳, 1788~1863)의 인연은 강진으로 귀양 온 이듬해인 1802년 10월이었다. 이 때 다산은 강진 읍내 주막집 문간방에 머물며 몇 명의 아전 자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의 한 소년이 “저같이 둔한 아이도 공부할 수 있습니까?” 주뼛주뼛 물었다. 다산은 “공부는 바로 너 같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아 부지런히만 한다면 큰 학문을 이룰 수 있다”고 직접 글을 써주며 격려했다. 이 소년이 바로 황상이었다.

16년 후, 정약용은 유배가 풀려 강진의 다산 초당을 떠나 지금의 남양주인 고향 마재로 돌아가게 된다. 척박한 풍토에서 행운으로 큰 스승을 가까이서 모시며 모든 것을 의지하고 따르던 강진의 제자들은 스승의 해배(解配) 소식에 환호와 동시에 이별의 슬픔을 맛봐야 했다. 다산도 여러 제자들과의 작별이 못내 아쉬워 다신계(茶信契) 모임을 결성했다.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이 귀한 것은 신의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함께 지내며 즐거워 하다가 헤어진 뒤에 서로를 잊는다면 그것은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고 적었다. 제자 몇은 서울까지 스승을 모시고 가서 고향집으로 편히 모신 후에 그 먼 길을 걸어서 돌아왔다. 그 후로도 해마다 제자들은 집집이 차를 따서 이것을 합쳐 덖은 합심차(合心茶)를 멀리 계신 스승에게 올려 보냈다. 다산은 제자들이 마제에 올 때마다 다산초당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1836년 황상은 스승의 회혼례를 참석키 위해 17일을 걸어 스승을 찾아갔다. 사제는 멀리서 서로를 그리다가 18년 만에 감격의 해후를 했다. 제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산은 먼 길을 찾아 온 제자에게 글로써 당부했다. “내가 아침저녁으로 아프다. 부고를 듣는 날에는 너는 마땅히 연암과 함께 산중에서 한 차례 곡하고, 지난 일을 얘기하며 함께 그치도록 해라”. 늙고 병든 스승은 세상 뜰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오십 줄의 제자에게 내 부고를 듣더라도 서울까지 올라 올 생각 말고, 강진에서 한 번의 곡만 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리고는 제자에게 선물로 책과 붓, 부채와 여비까지 꼼꼼히 챙겨 줬다.

병석에 누운 스승은 15세 때 처음 만나 어느덧 48세의 중년이 된 제자의 손을 차마 놓지 못했다. 다산은 결국 황상이 걸음을 돌려 강진 길로 떠난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중도에 부음을 들은 황상은 달려와 슬피 울며 스승과 영결했다.

다시 10년이 흘러 1845년 봄 황상은 스승의 기일에 맞춰 부르튼 발과 검게 탄 얼굴로 스승의 무덤 앞에 섰다. 손에는 스승이 마지막 헤어질 때 정표로 준 부채가 들려 있었다. 스승의 아들은 그 마음이 하도 고마워서 두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부채 위에 시를 차례로 지어 그 정을 기렸다. 이렇게 해서 스승과 아들과 제자 사이에는 정황계(丁黃契)가 맺어졌다.

황상은 일생 동안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황상이 75세 때 쓴 글은 그의 인품이 오롯이 묻어난다. “산방에 틀어박혀 일삼는 바라고는 오직 책을 베껴 쓰고 읽는 일 뿐입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말리면서 비웃습니다. 이들의 비웃음을 그치게 하는 것은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귀양살이 20년 동안 날마다 글 쓰는 것을 일로 삼으셔서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났습니다. 내게 ‘삼근(三勤)’의 훈계를 주시며 몸소 가르쳐주시고 입으로 전해주신 가르침이 마치 어제 일처럼 귀에 생생합니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럽고 핍절한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는 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한 마디도 빠짐없이 지키고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새 학기에 새내기들 모두가 다산 같은 위대한 스승을 만나 참다운 인생의 길을 걷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황계 사연을 적었다. 이 아름답고 고귀한 사제 간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김갑제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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