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에도 없는 2월의 걱정거리
팔자에도 없는 2월의 걱정거리
  • 전주일보
  • 승인 2018.02.0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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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 갑 제/ 언론인

나흘 후면 전 세계인의 대 축제 평창올림픽이 개막된다.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도 열흘 밖에 남지 않았다. 겹경사가 기다려지는 찬란한 2월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눈만 뜨면 지면을 장식하는 이 땅의 보수 세력과 야당정치인들의 저주에 가까운 막말은 모처럼 찾아온 한반도평화가 깨질까 봐 가슴을 조이게 한다.

팔자에도 없는 2월의 걱정거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올림픽이 코앞인데도 야권과 보수언론은 평화올림픽에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는다. “평양올림픽”이라고 비트는 건 다반사고 “어차피 깨질 평화이고 약속들이라면 빨리 깨지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등 남북한의 극한 대립을 부추기는 섬뜩한 말도 거침없이 쏟아 낸다.

자체 핵무장 선동 발언과 전쟁위기를 부르는 소름 돋는 말 또한 시도 때도 없는 단골 메뉴가 됐다. 남한은 올림픽의 목표가 전쟁 중지였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야권은 물론 언론도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삼가하고, 북한은 우리 정부가 정치권과 언론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권한이 없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남은 기간 불미스러운 일은 없지 않을까? 언 발에 오줌 누기 식 해결 방안이겠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평화를 기원해본다.

2월의 걱정은 이뿐 아니다. 어디에선가 춥고 배고픈 겨울을 나는 우리의 이웃들을 생각하면 짠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진다. 더욱이 올림픽이라는 세계적 대사에 묻혀 노약자와 어린이들이 더 허기진 명절을 보낼 수 있다는 현실은 가슴을 한층 더 먹먹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백번도 더 읽은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집을 또 꺼내 들었다. 언제 읽어도 가슴이 훈훈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는 작품을 읽기 위해서다. 조금씩 무디어져 가는 인간애(人間愛)를 다짐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작은 구둣방을 하는 마르틴 아브제이라는 가난한 늙은이가 예수님을 만나길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성경을 읽다가 깜빡 책상에서 잠이 든 그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속삭이는 듯한 소리는 자기 귀 옆에서 누가 가까이 대고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마르틴, 마르틴 내일 길을 보아라, 내가 갈 터이니.’그는 이 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이른 아침을 맞은 마르틴은 그 소리에 대해서 믿는 마음과 믿지 않는 마음이 각각 반 씩 이었다. 그러나 한번 믿어보기로 하고 창가에 가서 구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반지하인 가게 창가에서 일을 하며 어젯밤 일을 계속 떠올라 밖의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고 있는데, 눈을 치던 늙은 병사가 지쳐 눈 속에서 추위에 떨며 쉬고 있었다. 그는 얼른 반 지하 집으로 초대해 따뜻한 차와 빵을 대접 했다. 대접하는 도중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길을 내다보았다.

병사가 나간 다음 이번에는 아기를 데리고 얇은 여름옷에 낡은 신발을 신은 여자가 창으로 다가 왔다. 그녀는 바람을 등지고 벽과 마주서서 아기가 춥지 않도록 감싸주려 했지만 감싸줄 덮개 하나 없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돌층계 위의 그녀를 초대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전쟁에 나가고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다가 길에서 쉬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르틴은 먹을 것을 대접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녀가 돌아갈 때 낡은 외투와 약간의 돈을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것으로 목도리를 찾아 다시 두르도록 해요.”

여자가 가 버린 후 계속해서 창밖을 보던 마르틴은 한 노파가 사과 바구니와 나무가 든 주머니를 들고 가다 사과를 훔치는 소년과 실랑이를 벌이는 광경을 보게 됐다. 마르틴은 뛰어나가 소년을 용서해 주라며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처음엔 소년을 경찰서에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던 노파도 감동해서 용서를 하고 소년도 노파의 짐을 들어주게 되었다. 극적인 화해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저녁이 되어 성경을 보고 있는데 어두운 구석에 사람의 형체가 나타나 속삭이기 시작했다. “마르틴. 마르틴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누구를요?” 그러자 어두운 한 구석에서 늙은 병사가 앞으로 나오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형체도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나였다.”, 목소리가 말했다. 그러자 어두운 한 구석에서 아기를 안은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가 미소를 짓고, 빙그레 웃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것도 나였어.” 이어 할머니와 사과를 가진 사내아이가 함께 빙그레 웃으면서 마찬가지로 사라지며 목소리가 말했다. “그것도 나였다.”

마르틴은 몹시 즐거워져 안경을 끼고 성서의 펼쳐진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의 첫머리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가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그리고 같은 페이지 아래 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복음 제25장 40절)’

따뜻한 인간애(人間愛)가 어찌 기독교인만의 일이랴마는, 설 명절을 앞둔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주위와 이웃 살펴보기를 게을리 해선 안 되겠다. 유난히 추운 올 겨울 어디에선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추위에 떨고 계실 부처님과 예수님을 위하여…. /김갑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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