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멸차고 독한 내 마음 보자기
야멸차고 독한 내 마음 보자기
  • 전주일보
  • 승인 2018.02.0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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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김 고 운/수필가

어쩌다 내가 이렇게 야멸찬 사람이 되었을까? 건조한 실내공기에 잠이 깨어 가습기 물을 보충하고 다시 자려했지만 잠들 수 없었다. 퇴근길에 눈이 퍼붓는 아래서 본 아파트 상가의 불 꺼진 과일가게의 어두운 광경이 자꾸만 눈에 보여서이다.

그날, 가장 춥고 눈이 많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대로 눈이 거의 발목 높이만큼 쌓인 데다, 낮에 내린 눈이 얼어 빙판을 이루어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다. 6.5㎞ 거리를 1시간 반가량 걸려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함박눈이 퍼붓는 도로를 건너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작은 슈퍼와 고깃집 사이의 과일가게가 을씨년스러운 몰골로 불이 꺼진 채 닫혀있는 게 보였다. 진열대에는 눈이 수북하고 과일을 덮던 널찍한 비닐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본 작은 과일가게의 어둠과 하얗게 쌓인 눈이 내게 전해 온 의미는 한마디로 '아픔'이었다. 옆 가게의 무자비한 자본 공격에 쓰러진 작고 가난한 가게, 그 가게에서 발버둥치던 청년의 쓰라린 패배감까지 한꺼번에 전해지던 그 느낌이 너무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퍼붓는 눈 속에서 초라해진 몰골로 웅크리고 있을지 모르는 청년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옆의 슈퍼에 들어가 과일가게가 왜 닫혀있냐고 물었다. 슈퍼 아주머니가 짠한 표정으로

“젊은 사람이 밑천 없이 장사하다가 다 까먹고 결국은 문을 닫았지요. 그 옆의 고깃집 형제들이 돈이 많으니까 물건을 대량으로 사들여서 싸게 팔고 있는데 배길 재간이 있겠어요? 아재비 떡도 싸야 사먹는다고 하잖아요.”

그랬다. 칸이 두 배나 넓은 옆집 고깃집에서 점점 과일 진열 분량이 늘면서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이던 과일가게가 결국 경쟁에 밀려 문을 닫고 만 것이다.

과일가게가 경쟁에 밀려 문을 닫은 일이 그냥 마음에 밟혀서 잠을 못 이룰 만큼 내가 인도주의자이거나 동정심이 많은 사람인 건 아니다. 처음 이 아파트에 이사 왔던 때 내 아들 또래의 젊은이가 옆에 큰 가게와 경쟁하며 장사를 하는 걸 보고 일부러 과일을 사주거나, 남아 버릴 걸 알면서도 야채 따위를 사기도 했다. 그러면서 버거워하는 젊은이에게 단골손님을 확보하려면 정직하고 신용을 얻어야 한다고 나름 걱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내 말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몇 차례 물건을 사면서 지나치게 비싸다 싶은 물건도 있었지만, 도와주는 셈치고 언제나 부르는 대로 주고 과일이나 야채를 샀다. 그런데 언젠가 딸기를 한 상자 사는데, 알이 굵고 싱싱한 것이라며 돈을 더 받았다. 집에 와서 씻으려고 물에 쏟아보니 아래에는 이미 물러버린 딸기가 들어있었다. 물에 쏟은 걸 물려 달랠 수도 없어서 신선한 것만 먹고 나머지는 버릴 수밖에 없었다.

퍽 괘씸했다. 내가 상당기간 제 가게를 일부러 들어가 물건을 사주고 힘내라고 응원의 말도 해주었는데, 날 요즘 말로 ‘호구’ 영감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속이 단단히 틀어졌다. 그 길로 다시는 그 가게에 가지 않았다. 한번 틀어지면 다시 쳐다보지도 않는 나의 야멸찬 성정이 발동한 것이다.

혼자 사는 노인이 과일이나 야채를 사면 얼마나 살까마는 속이는 가게도 싫고, 돈으로 작은 가게를 위협하는 가게는 더욱 싫어서 좀 떨어진 큰 슈퍼마켓에서 과일을 사거나 야채는 로컬푸드 매장에 가서 샀다. 지난해 봄쯤부터 그랬다. 발길을 끊으니 관심도 줄어서 가게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오늘에야 그 작은 과일가게가 문을 닫은 걸 알게 된 것이다.

아내와 젖먹이 아들이 있는 것도 보았는데, 젊은 가장이 생업을 치웠으니, 요즘 같이 험악한 세상에 가정이 파탄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덧붙여 늘 가게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다시 발걸음을 하지 않는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조금 너그럽게 물건을 사주었더라면 가게를 치우는 일도 알았을 것이고 마음이라도 얹어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자책이 자꾸만 가슴에 치밀고 보깨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쩌면 청년은 드문드문 팔리는 물건이므로 조금 더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더 받기도 하고, 어려움을 알아주는 어른이니 감당해줄 것이라 믿고 부실한 딸기도 팔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내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그래봤자 몇 푼이 된다고 그렇게 무 자르듯했던가 싶은 후회가 더했다.

어쩌다 이렇게 야멸차고 독한 사람이 되었는지 탄식을 하다가 생각해보니, 내가 원래 그렇게 냉정하고 나 위주로 살아온 한심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발소도 한번 가서 맘에 들면 다른 이발소에 가지 못했고, 사소한 구멍가게도 다니던 집만 줄곧 갔다. 그러다가 뭔가 내게 서운하게 하거나 소홀하게 하는 기미가 있으면 칼로 베듯 관계를 잘라버리는 야멸차고 지극히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걸 생각했다.

젊은 시절에도 평소에는 남과 잘 어울리다가도 내게 조금만 소홀하다 싶으면 속을 터놓지 못하고 틀어져버리는 성미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아직도 매사에 너그럽지 못하고 비위에 맞지 않으면 냉갈령으로 돌아서버리는 못된 성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 젊은이가 가게를 치우면서 교훈이라도 얻었을까, 낙담하지 않고 일어설 여력은 있을까 하는 아픈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번졌다. 아직은 젊으니 실패를 거울삼아 멋지게 재기하기를 몇 번이고 기원했지만, 그러기 전에 내가 가게 한 번이라도 가주었더라면, 이렇게 짠한 마음이 덜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가슴을 후볐다. 죽기 전에 고치지 못할 이 좁은 소갈머리를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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