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 좀 안다는 나이에
뭣 좀 안다는 나이에
  • 전주일보
  • 승인 2018.01.1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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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문 광 섭 / 수필가

해가 바뀌며 새해에 거는 기대에 부푼 가운데 차갑고 매서운 겨울 날씨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TV에만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채널을 옮기다 보니 KBS의 아침마당이 귀와 시선을 사로잡았다. 내용인즉슨 ‘가족이 탄 배가 전복하는데 구명조끼는 하나밖에 없다. 누가 착용해야 하는가?’였다. 사회자가 패널(Panel)들에게 한 사람씩 견해를 물었다. 남녀노소의 차이가 확연했다.

‘젊은 청년은 당당히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했고, 중년은 아내에게 주고 싶으며, 장년인 부부는 자녀에게 주어야 맞지요. 했다. 그러나 60을 넘긴 사람들은 당연히 어린애나 자녀에게 줘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만약에 나였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다가 시선이 허공에 멈추었다. 그러곤 나이란 무엇이기에 생각이 깊어지는지를 생각하다가, 철학자요 나를 깨우친 김형석(99세) 교수의 자상한 말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작년에 TV 대담에서 한 이야기다. 김 교수가 75세 되던 해, 노 스승에게 전화로 문안 인사를 드렸더니.

“ 김 선생, 올해 나이가 몇이던가?”

“ 예, 일흔 다섯입니다.”

“ 그럼 뭣 좀 알겠구먼!”

하시더란다. 그때부터 곰곰 생각해보니 재대로 철이 난 때가 60을 넘기고 정년이 가깝던 무렵이었단다. 친구(김태길 교수, 안병욱 교수)들도 다 떠나고 이제 혼자만 남았는데, 다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철나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던 60대로 돌아가고 싶다 했었다.

 

내가 바로 지금 ‘뭣 좀 알겠구먼!’ 했다는 그 나이를 지나고 있다. 우연히도 64세에 심장 대수술을 치렀고, 합병증으로 인한 위험한 고비를 무사히 넘겨 11년여를 살아오는 동안에야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더구나 어머니를 여의는 시름과 동생까지 잃는 아픔마저 겹치며 잘못 살아온 세월의 회한을 뼈저리게 겪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불효가 컸다는 사실도 어머니가 작고하시던 순간까지도 헤아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어머니가 겪으시던 고초 하나하나를 그대로 본받아가면서 깨우치고 가슴을 쳐보지만, 때늦은 후회일 뿐이다. 그 첫 번째가 무릎 통증이다.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면, 노인이 겪는 퇴행성관절염이라며 약만 처방해줬다. 어머닌 아무 효과가 없다며 입소문 난 병원마다 찾아다니셨다. 그러면서 날마다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그때 내가 불쑥 던진 한마디가 지금도 내 가슴의 불덩이로 살아있다.

“어머니, 나이 때문에 그렇다는데 방법이 없잖아요. 의사 말대로 약 드시고 운동을 하세요.”라고 했었다. 한데 내가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다. 약은 일시적일 뿐이다. 노면이 거친 길이나 계단은 질색이다. 조금 무리해 걷고 나면 심한 무릎 통증을 겪으며 잠이 들지 않는다. 아내도 이해를 못 한다.

두 번째는 식사 중에 입가의 침을 닦는 일이다. 어머니가 손이나 화장지로 입가를 닦으면 음식이 묻어서 그러는 줄 알고 ‘아무것도 안 묻었어요.’라고 과민하심을 탓했었다. 3년 전부터 나 역시 그런 현상을 겪는다. 아내가 꼭 어머니 닮아간다고 했을 때 목이 메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이런 일을 나이 들어서 겪어야만 알게 되는 걸까! 이 또한 후회막심이다.

 

어제는 80대 노인이 대부분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역시 화제는 건강문제와 세상사가 대종을 이뤘다. 모두 공감하는 건 자리에 참석할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는 원동력은 여기저기가 아파도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배우자나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늙을수록 힘이 돼주는 말동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도 경청해 들었다.

문득, 홀로 살아오신 어머니의 말동무 역할에 무심했다는 반성이 일었다. 다만, 술 한 잔하고 귀가하면 어머니께서

“아비, 술 한 잔 했구먼! 그 노래(고향 초)나 한번 불러봐!”

하셨다. 마다치 않고 불러드렸던 일이 유일하게 잘한 일이었지 싶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왜 그렇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살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 이제 우리 내외만 사는 집안은 화기(和氣)가 없고 적막하다. 가끔 몰려와 집안을 온통 뒤집던 아이들도 발걸음이 뜸해졌다. 중고등학교 학생이 되다보니 와봐야 재미도 없고, 나와는 말동무도 안 되는 모양이다.

내 어릴 때, 할아버지까지 3대가 한집에 살면서 회초리도 맞던 시절이 그립다. 우리 손자들이 기억할 할아버지는 설날의 세뱃돈과 추석날 산소를 앞장서 갔던 정도에 불과할 것 같다. 올해부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자들과 친해지며, 오래도록 남는 일을 챙겨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특히 대학에 진학하는 큰 손자 수영이 와의 계획부터 서둘러야겠다. 내가 11년 전, 서울 현대아산병원에서 대수술을 앞두고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수영이 손이라도 잡아보고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데려오라던 일이 아련하다. 그 아이가 이제 대학에 진학한다니 꿈만 같다.

나는 확실히 구세대 사람인가 보다. 내 대를 이을 장손이라는 생각만 해도 뿌듯하다. 나의 조부님이 내게 관직에 나가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한다고 수차례 말씀하신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수영이가 대학에 합격하는 날, 그 아이가 좋아했던 ‘이바돔’에서 단둘이 점심이라도 해야겠다. 옛날처럼.

수필가/ 문 광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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