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늄 사랑
제라늄 사랑
  • 전주일보
  • 승인 2017.12.1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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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백 금 종/수필가

우리 집에서도 베란다에 화초를 기른다. 봄에 팬지와 군자란을 시작으로 가을에는 국화까지 꽃을 피워, 베란다를 작은 꽃밭으로 꾸며준다. 내가 그들에게 베푼 만큼 그들도 내게 아름다움과 그윽한 향기로 보답한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부리거나 손길이 소홀하면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없고 향기에 취할 수도 없다.

 

지난 초 봄 아파트 재활용품 코너 앞을 지나다 작은 화분 두 개를 발견했다. 퇴색된 화분에는 제라늄이 심겨 있었다. 줄기와 잎은 누렇게 변색되고 생육이 빈약 하였다. 메마른 분토는 굳을 대로 굳어서 금이 가고, 오랫동안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방치한 상태로 있다가 버려진 흔적이 역력했다. 주인한테 홀대를 받은 화초가 안쓰러운 생각과 함께 조금만 손길이 가면 회생할 것 같기에 가져다 길러보기로 했다. 들고 온 화분을 보고 아내는

“있는 것도 귀찮은데 뭐 하러 주워 왔느냐”고 탓했다.

“시들어 죽을 것 같은 제라늄이 불쌍하기도 하지만, 재활용 코너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 필요하면 가져다 잘 길러주시라”는 것 같아 가져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잘 길러 아름다운 꽃을 선사할 테니 기다려 보라”고 장담을 했다.

먼저 화분에 물을 흠뻑 뿌려 준 다음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놓았다. 조석으로 들어다 보며 행여 어떻게 될까 살펴보고 또 살펴보았다. 노심초사 하는 마음이 연약한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와 같았다. 이삼 일 정도 지나자 축 늘어진 줄기가 꿋꿋해 지고 생기가 돌았다. 되살아나겠다는 확신이 든다. 제라늄에 대한 나의 집착도 더욱 강해 졌다. 제라늄은 본래 향일 성 화초라는 점에 착안해서 하루에도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찾아 옮기기를 여러 번 했다. 온화한 바람이 제라늄 주변에서 치맛자락을 펄럭이고 강한 햇빛이 출렁이는 계절로 접어들자 줄기에 작은 돌기가 톡톡 솟아오르더니 급기야는 연두색 잎으로 돋아났다. 낙엽에 깻묵을 섞어 발효시켜 만든 효소 액을 뿌려주고 누런 잎도 제거해 주니 청순하고 기품 있는 작품이 되어 갔다.

예쁘고 앙증맞은 하얀색 화분을 구해다가 자양분이 풍부하고 물 빠짐이 좋은 부엽토로 분갈이를 해 주었다. 오래도록 살아갈 새 터전을 잡아 준 셈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태도는 사람이나 식물이나 마찬가지인가? 땅 맛을 알고부터는 기세 좋게 올라 왔다. 벽에 걸린 달력을 한 장 한 장 떼어낼 때마다 제라늄은 균형 잡힌 생명체로 그 모습을 갖추어갔다.

제라늄이 튼실해 질수록 내 마음도 밝고 환해졌다. 그리고 무언가 이룰 것 같은 희망에 마음이 설렜다.

 

살인적인 더위가 막바지에 이르고 가을빛이 나뭇가지에 서성이던 어느 날, 창밖 거치대에 놓여있는 제라늄 화분을 들고 온 아내가

“여보, 이것 보세요. 제라늄이 꽃을 피웠어요. 향기가 아주 진해요.” 원 줄기에서 꽃대가 솟아올라 포도송이처럼 꽃 무더기를 이루고 그 곳에서 다시 꽃대가 솟아올라 5엽의 예쁜 꽃을 피우고 있다. 나비 한 쌍이 살짝 내려앉아 날개를 세우고 사랑을 나누는 자태와 같다. 작게는 3-4개의 꽃망울에서 많게는 6-7개의 꽃망울까지 꽃이 피어올라 무리를 이루니 화분은 풍성한 꽃바구니가 아닌가? 정성으로 가꾼 주인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한 화분에는 분홍 꽃이, 다른 화분에는 빨강 꽃이 서로 경쟁하며 향연을 벌이고 있다.

분홍색의 제라늄은 우아하고 고결한 여성을 꼭 빼닮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격이 높고 은근하면서도 애교를 지닌 행복한 여인의 표상이라고나 할까? 엷고 부드러운 연약한 꽃잎은 비단 속에 감춰진 여인의 속살마냥 주인의 마음을 흔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빨강색 제라늄은 강렬한 색깔로 나를 압도한다. 정렬과 에너지가 출렁이는 불꽃이다. 모든 것을 불태워 한 줌 재가 남을 때까지 돌진하는 강인한 젊은이의 표상이다. 정열의 깃발이 나부끼듯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힘이 샘솟는다. 불가마 더위에 생성된 에너지가 꽃을 통해 분출하고 있다. 정렬적인 삶을 위해 발걸음을 내 딛으라 하며 나의 영혼을 깨우는 것 같다.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창밖 거치대에서 밤새 어둠속에서 힘을 응축했다가 기지개를 켜는 제라늄에게 달려간다. 꽃잎은 새벽녘 몰래 찾아온 이슬에 함초롬히 젖어 청순함이 극에 달한다. 잘 정화된 이슬로 몸을 씻은 꽃잎은 물속에서 갓 나온 아이마냥 싱싱하고 보드랍고 야들야들한 피부로 나와 눈을 맞춘다. 청초한 모습이 청량한 아침공기와 함께 심신을 카타르시스에 빠지게 한다. 죽어가는 꽃을 살려낸 정성을 아름다움으로 되돌려 받는 일도 사랑하는 마음의 한 줄기가 아닐까?

 

제라늄의 꽃말 ‘그대가 있어 행복합니다.’ 와 같이 하루의 문을 여는 나에게 잠시나마 행복감에 젖게 하는 순기능의 역할까지도 수행한다. 사색의 여유를 주고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제라늄은 자기를 버리지 않고 새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사랑해준 내게 고마운 듯 아름다운 꽃과 향으로 보답하고 있다. 나 또한 꽃을 통해 메말라가는 감성을 되살리고 잠시나마 행복감에 젖으며 사랑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자연과 인간의 상생이 아니겠는가?

백금종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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