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비빔밥
꽃 비빔밥
  • 전주일보
  • 승인 2017.11.23 14: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 수필
문 광 섭 / 수필가

가을이 깊어진 지지난주에 ‘2017 원로 보이스카우트의 연찬회’가 충남 아산시에 위치한 제일관광호텔에서 진행되었다. 1박2일 일정가운데 근처의 ‘맹씨 행단’과 ‘세계꽃식물원’을 방문했다. 찬란하게 물든 낙엽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찾아간 식물원은 별천지였다. 세계 각지의 휘황찬란한 꽃들이 만발해 있어 바깥세상의 추위나 시름 따위는 잊어도 좋을 만큼 훈훈했다.

온실에서 수만 가지의 화려한 꽃을 관람하고 나오는데, 은은한 향이 유혹했다. 향기에 솔깃해서 따라가 보니, 출구 쪽에 수십 가지의 각종 허브가 저마다 특유의 향내를 발산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향이 섞여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내가 평소에 익히 알던 향조차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나름 익숙한 향기를 찾아 꽃과 식물의 이름을 확인하고 있는데, 어서 따라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동행들의 채근에 못 이겨 식당으로 갔더니, 이게 웬 것인가? 식탁에 차려진 점심이 라는 게 아까 보았던 화사한 꽃들을 곱게 섞어 그릇에 담아 놓은 꽃 비빔밥이었다. 꽃과 향기에 유혹 당하여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 어려운 판에 그 꽃으로 비빔밥을 차려놓아 또 한 번 내 맘을 설레게 했다. 내가 누군가? 비빔밥의 본향에 사는 사람이 아닌가? 그동안 각종 비빔밥을 70여 년 동안 먹어봤으나 꽃 비빔밥은 처음이었다.

얼핏 보면, 코스모스나 백일홍같이 보이는 흰색 분홍색 주황색 보라색과 연한 핑크색 꽃잎이 각종 채소와 함께 이리저리 섞이고 어울려 방긋거리고 있었다. 밥을 쏟아 넣어 비비기가 주저되어 한참이나 눈을 맞추어야 했다. 잠시나마 눈길로 속삭이다 보니 고향이 어디며,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싶었다. 주인의 대답은 아프리카봉선화로 ‘임파첸스’종류인데, 식용 꽃식물이라고 알려주었다.

 

문득,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양푼에다 열무와 보리밥을 넣고 찐 된장으로 비벼 주면 정신없이 퍼먹던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본래 비빔밥을 좋아했다. 하여, 열무김치만 보면 무채 나물이나 콩나물무침이 있는지 찾는다. 이 세 가지가 다 있으면 좋고, 최소한 열무김치와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바로 비벼먹는다. 고추장은 필수고 참기름은 금상첨화다. 매큼 달큼 새큼한데다 고소한 맛에 아삭아삭하게 씹히던 그 시절의 비빔밥의 맛을 어디에 비길 수 있으랴.

꽃 비빔밥을 보다가 그 옛날 가난하던 시절에 죽마고우들과 먹던 비빔밥추억이 아스라한 저편에서 슬며시 돋아나왔다. 지독히 못살던 시절의 봄 보릿고개는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에겐 가장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 나와 함께 놀던 친구들이 점심때면 풀이 죽었다. 대부분 점심을 거르던 아이들은 물로 허기를 채워야 해서다.

당시에 농토가 제법 있던 우리 집에는 여유 있게 밥을 해놓았으므로 나는 물어보지도 않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몰려갔다. 밥 때에 몰려오는 아이들을 본 누이가 얼른 눈치를 채곤 두어 그릇의 밥에다 상추, 부추, 채소를 몽땅 넣고 비벼서 5, 6명이 맛있게 먹도록 해 준 일은, 엊그제 초등학교 총동창회 모임에서도 떠올렸던 추억거리였다.

 

옆에서 식사하던 Y형이 ‘밥도 안 먹고 무얼 하느냐?’고 채근해서야 비빔밥 꿈 여행은 끝났다. 꽃잎에다 밥을 쏟아 붓기가 약간 미안했다. 열 가지나 되는 온갖 유채 순이며 들나물이 얼굴을 드러냈다. 아주 부드럽고 연한 새싹들도 꽃과 함께 옅은 향기를 뿜었다. 살며시 밥을 붓고 고추장을 두 숟갈이나 넣어 비볐다. 파프리카를 섞어 만든 고추장이라 전혀 맵지 않아서였다. 부드러운 잎과 순들로 어우러진 꽃 비빔밥은 입안에서도 부드럽게 씹혔다. 오색의 꽃잎이 입 안 가득 향기를 퍼뜨리며 기분 좋게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약간 꽃잎들에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일상 먹는 채소와 다를 바 없었다. 꽃 비빔밥과의 밀월은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끝내야 했다.

 

버스에 올라 옆에 앉은 전남의 R회장과 비빔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주비빔밥을 드셨던 곳과 맛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뜻밖에 인상에 남는 기억과 소회가 없다고 했다. 비빔밥이야 그저 어딜 가나 똑같지 않으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우리의 자랑인 전주비빔밥이 사정없이 무시당한 느낌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무안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정통 전주비빔밥집으로 초대하겠다고 약속했다. 가격의 차이가 있는 점과 전통 음식점으로 공인되거나 명인으로 지정된 분이 운영하는 업소가 따로 있다는 말로 설명을 끝냈지만 맘이 편하지 않았다. 항공기 기내식으로까지 이름을 올린 ‘전주비빔밥’이다. 전주의 자랑인 ‘전주비빔밥’이라는 명칭은 아무나 쓸 수 없도록 업소의 자격심사를 통해서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 맛을 본 ‘꽃 비빔밥’도 향기와 맛에서 충분히 개발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앞으로 꽃 비빔밥도 대중화되리라고 본다. 그러나 서양 봉선화의 짙은 색상보다 우리 재래종 봉선화의 은은하고 고운 색깔이었다면 더 은근한 맛이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무슨 연유일까?

문 광 섭 /수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